원숭이, 네 지문은 까망

한겨레21 2023. 9. 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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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기도 이젠 지쳤다.

어떤 직원은 "잠깐만요" 답하곤 동료에게 가서 쑥덕대고, 어떤 직원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지문스캐너를 내밀며 일단 손가락을 올려보라고 채근한다.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등록된 지문도 없는데 선생님이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이거 잘못 발급해줬다간 큰일 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인감증명서를 떼지 못한 적은 없지만, 순순히 받아본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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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

2018년 서울대공원. 알락꼬리여우원숭이가 내게 (지문으로) 신원을 확인해주고 있다.

싸우기도 이젠 지쳤다.

살다보니 다양한 이유로 인감증명서를 떼야 할 일이 생긴다. 그때마다 주민센터 앞에서 머뭇거린다. 자동발급기를 쓰면 좋으련만, 날 알아주지 않는다. 내 지문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구 직원은 대개 “네 ?” 반문부터 하고는, 천연기념물을 보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위아래를 훑는다. 어떤 직원은 “잠깐만요” 답하곤 동료에게 가서 쑥덕대고, 어떤 직원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지문스캐너를 내밀며 일단 손가락을 올려보라고 채근한다. 어서 끝내고 싶어 손가락을 내밀지만, 스캐너는 읽지 못한다. “ 인감증명서는 등초본보다 중요한 문서라 이대로는 발급해줄 수 없다”는 직원을 만나 반시간 넘게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었다. 운전면허증만으로 숱하게 증명서를 발급받았다고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등록된 지문도 없는데 선생님이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요  이거 잘못 발급해줬다간 큰일 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인감증명서를 떼지 못한 적은 없지만, 순순히 받아본 적도 없었다.

주민등록증이 없다. 1999 년 온 국민을 상대로 벌인 주민등록증 일제 갱신 때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을 거절한 대가로 나는 ‘기본신분증 ’ 을 받지 못했다. 신념이 또렷한 걸까, 똥고집이 지나친 걸까. 흘러버린 시간 앞에 그조차 아리송하지만, “지문도 없는데 어떻게 ( 당신임을 ) 알겠느냐” 는 말은 오래도록 머리에 맴돌았다. 너와 나를 구별하는데, 지문은 그토록 중요한가.

지문은 영장류가 나무를 잘 타기 위해 진화한 걸로 알려졌다. 그럴듯하다. 지문의 굴곡과 문양은 물체와 손 사이의 마찰력을 증가시키니까. 유인원과 원숭이에게도 사람과 비슷한 지문이 있고, 코알라에게도 지문이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문은 미끄럼 방지뿐만 아니라, 물체를 만질 때 미세한 진동 신호를 증폭시킨다. 촉각을 예민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 700 여 종 가운데 독성이 적은 50 여 종을 골라 먹는데 이때 손의 섬세한 촉감과 지문의 도움을 받는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고 변하지도 않는 지문을 범죄수사에 이용하려는 시도는 세계사에서 오래됐지만, 온 국민의 열 손가락 지문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관리비용만 한 해 200 억원을 웃돈다. 똑같은 지문이 없어 범인 찾기에 좋다지만 , 똑같이 복제하기 쉬워 악용하기도 쉽다. 2014 년엔 남의 지문을 얇은 실리콘에 복제해 여러 증명서를 발급받아 50 억원대 땅을 가로챈 일당이 잡혔다.

원숭이 손바닥은 사람과 다르다 . 다른 점을 빼면 , 닮은 점이 남는다. 뭘까.

원숭이를 가두는 방법은 ( 사람처럼 ) 다양하다 . 인도 동물원에선 사람과 원숭이가 그냥 섞여 있다. 철창이나 그물에 가두는가 하면 다른 동물과 섞기도 하고, 이렇게 아크릴 상자에 ( 보기 좋으라고 ) 넣어두기도 한다. 캭캭 소리를 듣고, 꺅꺅 답하다보면, 감옥에 면회 온 기분이다. 아크릴은 빠르게 지문으로 얼룩진다. 이렇게 많은 지문을 여봐란듯이 남겼기에, 너, 갇힌 거니.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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