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30년 대미 관계 정상화 노력 포기하고 러시아와 ‘새로운 시대’ 여나

정원식·최서은 기자 2023. 9. 1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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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현지시간) 러시아 연해주 하산에서 알렉산드르 코즐로프 러시아 천연자원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4년 만의 정상회담은 북한 체제가 지난 30년간 추진해온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포기하고, 표면적으로만 가까웠을 뿐 실질적으로는 거래가 많지 않았던 러시아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북, 미국과의 30년 관계 정상화 노력 포기”

미국 미들베리국제연구소의 로버트 L. 칼린 연구원과 지그프리드 헤커 교수는 12일(현지시간)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러시아에 대한 김 위원장의 행보는 전술적인 것도, 절박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면서 “그것은 북한 정책의 근본적 변화의 결과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30년간의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들은 “북한이 1990년부터 2019년까지 얼마나 끈질기게 관계 정상화를 추구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재 정책 변화의 깊은 뜻과 향후 (변화의) 전조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냉전이 끝날 무렵 (북한) 통치 왕조 창시자 김일성은 붕괴하는 구소련과 고압적인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정책을 공식화했고 그의 아들 김정일은 대미관계 정상화와 핵개발 병진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김일성의 정책을 따랐다”고 말했다.

이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이 같은 선대의 정책을 이어받아 핵·미사일 프로그램 고도화와 대미 협상을 함께 추진했으나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근본적인 정책 변화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고 회담장에서 걸어나가자 화가 났고 당황했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몇 달간 바이든 행정부에 변화 의지가 있는지 지켜보았다면서 그해 8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 직후 근본적인 정책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그해 가을 북한 외무성 웹사이트에 쿠릴열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고 대만 문제에 대해 “한반도의 미묘한 상황을 촉발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어 2022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 “우리 주도로 취한 신뢰 구축 조치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고···일시 중단된 모든 활동을 재개하는 문제를 조속히 검토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2022년 3월에는 북한이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주장한 미사일을 처음으로 발사함으로써 2018년 북·미 정상간 비핵화 합의가 깨졌다.

칼린 교수와 해커 교수는 “이후 북한은 이웃 강대국들에 대한 완충 장치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했던 기존 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판단이 반영된 일련의 발언과 행동을 이어나갔다”면서 “장기적인 지정학적 흐름에 따라 러시아와 중국과의 관계 재조정이 가장 현실적이고 아마도 안전한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북·러 관계 “새로운 시대” 열리나

전문가들은 이번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북·러 관계에 ‘새로운 시대’가 예고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 위원장이 러시아를 찾아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국제 사회에 외교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면, 이번 방문에선 실질적인 무기 거래가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한 국가 중 하나”라면서 “1953년 이후에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탄약이 남는 상태”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무기를 제공하는 대가로 러시아가 위성과 핵잠수함 첨단기술 및 식량을 제공해주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이어 “상호 이익이 되는 합의가 이뤄지면,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무역으로 제한됐던 양국 관계가 보다 실질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며 “서방은 글로벌 안정에 더 많은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러시아가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기로 결정한 것은 김일성이 1948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을 건국한 이래 양국 관계 역학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한국 전쟁 이후 수십년 동안 소련의 지원에 크게 의존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하면서 북한에서는 최대 300만명이 사망하는 치명적인 기근이 발생했고, 이후 러시아는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를 지지해왔다. 소원해진 양측 관계는 김정은 위원장이 2019년 푸틴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야 회복되기 시작했다.

표도르 테르티츠키 국민대 연구 교수는 “만약 협상이 성사된다면 1990년에 시작된 북러 관계의 한 시대가 진짜로 끝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양국관계는 이전까지 말만 많았지, 실제 거래는 없었다”며 “러시아가 북한에 군수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는 거래가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욱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AP통신에 “푸틴 대통령은 고갈된 무기 재고로 궁지에 몰린 반면, 김 위원장은 한·미·일 3국 협력의 압력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윈윈’하는 거래가 될 것”이라면서 “지금은 서로의 필요성이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에 외교적 메시지를 던지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프리다 기티스 CNN 국제문제 칼럼니스트는 “북러 회담은 김정은의 입지를 강화하는 일종의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제공한다”면서 “북한은 중국을 향해 자신들이 다른 선택권을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주려 한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최서은 기자 ciel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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