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는 캄캄한 비즈니스 터널 지날 때 꼭 필요한 도구”
● 모든 밸류체인이 ESG와 연결된 시대 도래
● 진정한 ESG경영 = 전략적 관점 의사결정
● ESG 대응 아닌 ‘활용’하는 기업이 생존
제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로 북상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8월 8일, 서울의 낮 최고기온은 34℃, 습도 55%, 체감온도 39℃를 기록했다. 이날은 절기상 입추(立秋)였지만 양산과 손풍기 없이는 한낮의 거리를 걸어 다니기 힘들 지경이었다. 지역별로 보름 넘게 낮 최고기온 35℃ 안팎의 무더위가 이어져 시민들은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체감해야 했다.
기후위기는 매년 인류의 숨통을 죄여오고 있다. 이즈음 쏟아진 보도에는 '역대 최고' '기록 경신' 등 위협적 단어들이 포함됐다. 8월 4일 AFP 통신은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 산하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가 공개한 '5세대 국제 기후대기 재분석'에서 7월 30일 기준, 세계 해수면 평균온도는 20.96℃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이튿날 ABC는 미국 알래스카에 빙하가 녹으면서 인근 멘델홀강이 범람해 강가에 위치한 이층집이 순식간에 강물 속으로 빠지는 영상을 보도해 충격을 안겼다.
美 2024년 기후 공시 의무화, 대대적 변화 예고
오늘날 기후위기는 인간뿐 아니라 기업의 생존도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 대기업들은 기후위기로 큰 피해를 보았다. SK하이닉스는 2020년 7월 태풍 바비 여파로 경기 이천시 공장이 침수됐고, LG전자 역시 2022년 8월 태풍 마이삭으로 인해 경기 안산시 공장이 침수돼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기후위기는 기업에 재산상 피해를 줄 뿐 아니라 공급 및 물류 지연, 에너지 비용 상승 등을 야기해 수익을 악화시킨다.기업은 기후위기 타계 및 경영 정상화 전략으로 ESG경영을 지속적으로 요구받고 있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경영 방식으로 2000년대 후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다가 2015년 12월 유엔 파리기후변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본격화했다. 파리기후변화협정은 각국이 지구의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 대비 연간 1.5℃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노력하기로 약속한 협정이다.
유럽을 비롯한 각국은 파리기후변화협정의 구체화를 위해 일찌감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미국 정부와 기업들은 선도적으로 나서는 모양새다. 8월 8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발표한 '미국 ESG 트렌드와 공급망에 주는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기업들에 RE100(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 사용), 넷제로(탄소배출=흡수), 탄소네거티브(배출<흡수) 등 청정에너지 사용과 탄소저감 및 제거를 위한 신기술 개발을 장려하고 있다. 실제로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는 탄소배출량 데이터 공유 및 측정 시스템 개발 등 기술혁신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연말까지 기후 공시 의무화를 확정하고, 2024년부터 미국 상장사에 규모에 따라 순차적으로 공시할 것을 주문해 대대적 변화가 예고된 상황이다.
ESG경영을 연구하는 학자와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 기업과 정부가 발 빠르게 대응해야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준희 법무법인 지평 ESG센터 전략그룹 그룹장도 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미국 텍사스 A&M 대학 국제학 석사 졸업 후 두산그룹 지주 전략지원실에서 공유가치창출(CSV) 경영을 연구했고,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리스크자문본부 ESS팀 이사를 거쳐 2021년 지평 ESG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해를 거듭할수록 ESG경영의 중요성이 강화되는 글로벌 비즈니스 트렌드를 목도한 이 그룹장은 기업 관계자들에게 개념을 설명하고, 경영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5월 'ESG 생존경영'을 출간했다. 그는 책을 통해 "ESG 경영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외부의 요구사항에 '대응'만 하지 않고, 요구사항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를 만나 우리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추구해야 할 실질적인 ESG경영 전략은 무엇인지 물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고전하던 기업들이 올해 상반기 가까스로 정상화 궤도에 올랐다. 이런 시기 기업들에 ESG경영을 추구하라는 것은 무리 아닌가.
"코로나19 팬데믹은 여러 리스크 가운데 하나가 터진 것이다. 코로나19 리스크가 사라져도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계속 바뀌고, 이런 리스크는 더 많아질 것이다. 기후는 변하고, 그 안에서 돈 줄기도 변하고, 기업의 역할과 기능도 변하고 있다. 변화를 어떻게 읽고, 어느 정도의 속도로, 얼마나 자원을 투자할 것인가 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ESG경영을 놓고 전략적 고민을 하지 않으면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 '우리는 경영 기법 전환 안 해도 생존할 수 있다'면 ESG경영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앞으로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밸류체인이 ESG와 연결돼 있고, 돈 줄기가 그쪽으로 옮겨가고, 산업의 패러다임이 이제는 ESG경영을 하지 않고 생존할 수 없는 시대로 가고 있다. 장담컨대 앞으로 숫자(영업이익)만 따질 수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손해 보면서 운영하라는 얘기 아냐"
현실적으로 기업의 체질을 바꿔가며 ESG경영을 추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기업들이 어떤 전략으로 접근해야 할까."ESG경영은 위험한 비즈니스 터널을 지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경영 도구라고 생각한다. 경영 도구의 핵심 사용법을 알고 터널 끝 세상을 준비하는 기업만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ESG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이 참 많은데, 나는 ESG 개념이 나오기 전인 10여 년 전부터 기업 CSV(Creating Shared Value) 등을 연구하며 ESG로 확장해 보고서를 써왔다. 그런데도 누군가 내게 'RE100에 따라 탄소배출량 어떻게 줄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렵다. 물론 해외 사례를 찾아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지만 테크니컬한 부분, 실천 방법은 기업이 찾아야 한다. 기업이 처한 현실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업종에 따라 E를 강화할지, S를 강화할지 다르다. 제조사라면 E, 플랫폼 기업이라면 S에 집중해야 한다. 기업의 규모에 따라서도 ESG경영의 접근 방식이 다르다. 현재 ESG경영 공시를 하는 대기업도 많다. 반면 대다수 중소기업은 거래하는 해외 업체가 자국 환경 기준에 맞추라고 하면 맞춰야 하는, ESG경영을 이제 시작하는 단계다. 기업 상황에 따라 ESG경영 전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각각의 처지를 떠나 기업들이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의미의 ESG경영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결국은 기업이 이해관계자, 그러니까 고객사·투자자·협력사·시장 등의 요구와 신뢰를 얻기 위해 전략적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ESG경영이라고 본다. 그런데 '기업은 손해를 보더라도 생물다양성을 지켜야 한다' '기업은 따뜻한 자본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위험한 생각이다. 기업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러기 위해서 투자를 해야 하는데 기업한테 손해를 보더라도 따뜻한 자본주의를 강요하면 망할 수도 있다. 물론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고, 포트폴리오도 바꿔야 한다. 기업이 그런 걸 하는 이유는 NGO처럼 환경의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글로벌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만약 어떤 기업이 '지금 당장 100만큼 수익을 내고 싶지만 미래에 더 성장해야 하니까 지금은 50만 벌고, 여력으로 30년 안에 규제 100% 지키도록 준비를 시작할게'라고 하면 이것도 진정한 의미의 ESG경영이다. 기업은 위기와 기회의 딜레마 사이에서 냉정한 분석과 스마트한 열정을 기반으로 중장기적 시각을 갖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기후위기 때문에 E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실이다. 동의하는가.
"지금 기업들은 ESG, 모두를 요구받고 있다. 탄소배출량 감축 데이터(E), 이해관계자와의 소통(S), 이것을 공시하는 일(G)까지 다 해야 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카카오모빌리티라면 소비자 보호, 협력사 인권 등이 중요하다. 반면 화학회사처럼 탄소배출량이 많은 곳은 유럽 고객사가 '너네 탄소 데이터 내놔' 그러니까 이게 더 중요한 거다. 하나만 딱 중요하다고 볼 수 없다. 모두가 같은 과제를 받아 들고 있다."
기술력 강화, 자원 선순환, 공시까지 숙제
생성 AI의 발전으로 산업계에 급격한 변화가 이는 지금, 각 기업도 ESG 관련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기술과 신소재 등에서 찾고자 하는 분위기다. 특히 탄소 및 재생에너지 관리 영역에서는 글로벌 기업의 탄소배출량 감축에 기여할 기술 개발에 뛰어든 스타트업도 눈에 띈다. 미국의 기업 간 소프트웨어 업체인 세일즈포스는 2022년 탄소배출권 거래 플랫폼 '넷제로 마켓플레이스'를 만들었다. 글로벌 표준에 따라 검증 프로세스를 통과한 풍력, 태양광, 나무 심기 등 환경 기업가들의 프로젝트를 기업이 후원함으로써 탄소배출권을 전자상거래처럼 사고팔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도 재생에너지 거래 플랫폼과 금융상품 등이 빠르게 개발되는 추세다.국내에서도 일부 업계에서 신소재 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도 나온다.
"개발은 하지만 공급망을 갖출 만한 수준에 이르기가 매우 힘들다. 예전에 내가 스타트업 평가를 간 적이 있는데, 미대 출신 젊은 친구들이 폐페트병 조각으로 너무 멋진 의자를 만들어 와 투자를 요청했다. '만약 롯데그룹에서 5개 백화점 1층에 2개씩 전시할 테니 똑같은 품질로 10개 만들어달라고 하면 얼마나 걸리겠나?'고 물었더니 '1개 만드는 데 6개월 걸렸다'며 10개는 어렵다고 하더라. 상용화까지는 생각을 못 한 거다. 이처럼 스토리가 있는 제품이 인큐베이팅 돼서 시장에 나와 고객을 만나는 건 아직까지 어렵다. 이런 일이 각 기업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애플은 자사에 프레임을 납품하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 재활용률을 30%까지 높이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 재활용 플라스틱 칩을 가져와서 넣어야 하는데 폐플라스틱을 가져오는 것부터가 문제다. 결국 기업이 재활용 기술력을 강화하고, 자원 선순환을 달성해 환경 규제 안에서 공급망을 관리하며, 마지막에 ESG경영 공시까지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 시대로 가고 있다."
기술 및 신소재 혁신으로 ESG경영에 성공하는 기업이 결국 승자가 될 것 같다.
"많은 기업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화하려면 첫째로 신소재 공급 프로세스를 개선해야 하고, 둘째로 그것을 토대로 한 신제품으로 시장을 뚫어야 한다. LG화학, 롯데케미칼 등 화학회사들이 첨단 신소재 개발에 나서는 것이 석유화학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세제를 만드는 유니레버의 경우 2050년에 친환경 생활용품 회사로 거듭난다고 선언했다. 유니레버에 50여 년간 납품을 해온 국내 화학회사는 위기를 느끼고 있다. 유니레버가 중국에 친환경 바이오 물질을 개발하는 조인트 벤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해당 화학회사도 차세대 먹거리 개발을 위해 신소재 개발에 나섰다. 현명한 판단이라고 본다. 그런데 신소재를 개발하고, 이것이 대중적으로 유통되게 하려면 어마어마한 투자와 개발이 계속돼야 한다. 기업으로선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필요한 일이고, 전략적·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할 과제다."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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