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없는 고통은 필요없어… 이책 덮을땐 ‘퇴사결심’ 하시길”

박세희 기자 2023. 9. 13. 09: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정보라 작가, 4년만에 새 소설 ‘고통에 관하여’ 출간
완벽 진통제로 고통 사라진 세상
사이비 교단 배경으로 고통 탐구
“고생부터 강요하는 한국사회 구조
사이비 단체 작동원리와 비슷해
고생 끝엔 낙이 아니라 골병 와
나를 괴롭게 하는 건 손절이 답”
새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를 낸 소설가 정보라. HyeYoung 제공

소설의 배경은 ‘고통 없는 세상’이다. 한 제약회사가 개발한 완벽한 진통제 ‘NSTRA-14’ 덕분에 인간은 신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런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고통만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등장하고 세를 불린다. 그러던 어느 날, 교단의 지도자들이 끔찍하게 살해된다.

지난해 소설집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소설가 정보라가 4년 만에 낸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다산책방)는 고통만이 영혼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교단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을 서늘한 시선으로 그리며 고통의 의미를 깊이 탐구한다. 작가와 지난 9일 서울 중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고통’에 대한 정 작가의 관심은 꽤 오래전에 시작됐다. 러시아와 폴란드 문학에 대해 쓴 박사 논문 1장의 제목이 ‘고통과 괴로움’이었다. 이후 2018년 미국에서 열린 과학소설(SF) 관련 행사에서 통증과 진통제에 관한 대담을 들은 후 소설의 얼개를 짰다. 2019년에 쓰기 시작해 약 2년간 고치고 추가했다.

사이비 교단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만큼 작가는 사이비 단체에 관한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책들을 참고했다. 세계 각지의 거의 모든 사이비 단체는 공통적인 특징 몇 가지를 지니고 있었다. “교주를 신격화하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고립시킨 후 위협합니다. 교주는 추종자가 제대로 생각할 수 없게 잠을 재우지 않는 등 일종의 고문 기법을 쓰는데요. 그렇게 추종자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고, 교단에서 나가는 선택지 자체를 떠올릴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작가는 사이비 단체의 작동 원리와 한국 사회의 착취 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사이비 단체들이 가진 어떤 부분은 제가 경험한 한국 사회와 비슷합니다. ‘4시간 자면 대학에 떨어지고 3시간 자면서 공부해야 대학에 갈 수 있다’부터 시작해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고방식들이 유사하죠. 잠을 줄여가며 엄청나게 열심히 살지 않으면 빈곤 속에 버려질 것이라는 공포가 가득해요. 고생을 견뎌서 성취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으면 모르겠는데 뭘 성취하고 싶은지, 왜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안 그러면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거라고 협박받기에 하는 거예요. 고생 끝엔 낙이 아니라 골병이 옵니다.”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큰 그는 평소 성소수자 인권 향상, 장애인 차별 철폐 등 각종 사회적 이슈의 현장에서 투쟁한다. ‘싸우는 소설가’ ‘데모하는 작가’로 불리는 이유다. ‘고통에 관하여’의 등장 인물 중 그나마 행복한 삶을 살아갈 거라 기대되는 이는 성소수자 커플뿐인데, 작가는 “작정하고 그렇게 썼다”고 말했다. “소설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성소수자이고요, 이성애자는 살인을 하든 죽임을 당하든 둘 중 하나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보면 성소수자 분들이 젊은 나이에 너무 많이 죽어요. 이런 현실에 화가 나 일부러 성소수자만 잘 사는 소설을 쓰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정 작가가 원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그는 ‘다양한 선택지’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누구나 다 비슷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사회이길 바랍니다. 돈이 없다거나 장애가 있다거나 성별이 어떻다거나, 이런 게 걸림돌이 돼서 누구는 너무 쉽게 하는데 누구는 꿈도 못 꾸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의 선택지를 늘리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어떤 점을 느끼길 원하느냐고 묻자 “다들 퇴사를 결심했으면 좋겠다”는 다소 도발적인 답이 돌아왔다. “계획 없이 무작정 그만두라는 건 아니다”라고 웃으며 말한 그는 이렇게 부연했다. “한국 사회에 속아 착취적인 삶을 악으로 지속하고 계시는 분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무언가에 계속 고통당하고 있고 괴로워서 제 소설을 찾아 읽으셨다면, 이를 끊어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됐든 단체가 됐든 내 생계를 인질로 잡은 채 괴롭힌다면, 그리고 이로 인해 내가 괴롭다면, ‘손절’이 답입니다. 의미 없는 고통은 필요 없습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