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강제규 감독 "'1947 보스톤' 만난 건 행운…영화 같은 실화에 매료됐죠"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 르네상스의 중심엔 최초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 역대 두 번째 천만 관객을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었다.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 이후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내내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 강제규 감독이 이번엔 1947년 서울 한복판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1947 보스톤'(감독 강제규)을 통해서다.
오는 9월27일 개봉을 앞둔 '1947 보스톤'은 1947년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마라토너들의 도전과 가슴 벅찬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연출을 맡은 강제규 감독은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스포츠한국과 만나 '장수상회' 이후 8년 만의 신작 '1947 보스톤'을 선보이는 소감을 밝혔다.
"대학 때 영화 '불의 전차'를 보고 언젠가 달리기와 관련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달리기의 미학에 매료되면서 자연스럽게 손기정 선생님에게 관심이 생긴 것 같아요. 사실 처음 시나리오를 읽는데 거짓말 같았어요. 이토록 영화 같은 일이 있었다는데 몰랐다는 게 부끄러웠고 진짜 사실인지 궁금해서 직접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어요.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의 삶은 각자 영화로 한 편씩 만들어도 될 정도의 이야기인데요, 그 시절 세 사람은 혼란 속에서 무엇을 꿈꿨을지, 우리가 힘든 시절에 각자의 소임을 열심히 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게 오늘날 우리나라를 만든 동력이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제가 안을 수 있어 행운이었죠."
'1947 보스톤'은 1947년 혼란스러운 정세 속,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통해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나선 손기정 감독과 서윤복, 남승룡 선수의 실화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도 가슴에 단 일장기 때문에 웃을 수 없었던 손기정은 빼앗긴 영광을 되찾기 위해 서윤복과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준비한다. 강제규 감독조차 '거짓말 같다'고 느꼈을 만큼 드라마틱한 실화가 버티고 있기에 '1947 보스톤'은 과장된 연출 대신 담백한 화법으로 이야기가 가진 무게감과의 균형을 잡았다.
"처음 투자자들이 걱정했던 게 요즘 젊은 친구들은 옛날 시대극 관심 없고 잘 안 본다는 점이었어요. 또 마라톤은 종목 특성상 엑스트라가 많이 필요한데 다 외국인이어야 하니까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부담이 있었죠. 현란한 액션, 카체이싱, 폭발 장면도 없고 그냥 뛰는 건데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드냐는 거예요.(웃음) 여러 우려가 있었지만 이야기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으니 젊은 관객들이 거부감 없이 이 시대로 올 수 있게 장벽이 될 만한 부분은 최소화했어요. 그래서 인물들의 말투, 행동 등에서 시대감을 상쇄시키더라도 관객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연출했죠."
'1947 보스톤'은 전체적인 색감은 물론 생활감이 느껴지는 한옥, 모노톤 의상 등 세밀하게 디자인한 프로덕션으로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특히 클라이맥스로 꼽히는 후반부 마라톤 대회 장면은 종목 특유의 역동성과 박진감을 고루 갖춰 감동을 고조시킨다. 근육의 움직임, 땀방울, 눈빛 등 디테일까지 신경 쓴 배우들의 열연이 만든 명장면이다. 그 뒤엔 강제규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숨어있었다.
"다른 스포츠 경기는 득점이라든지 연속되는 재미가 있는데 마라톤은 다르죠. 팀워크로 이루는 것도 아니고 치밀한 자기 분석과 계산으로 혼자 42.195km를 감당해야 해요. 보통 100m를 20초 이내 속도로 계속 달려야 기록이 나오는데 거의 초인적인 것이죠. 그래서 배우들에게 우리가 마라톤 경기 전체를 찍진 않지만 그 정신을 이해하고 찍어야 한다고 늘 얘기하곤 했어요. 연출적으로는 제한된 시간 안에 이 경기를 어떻게 농축할까 가장 신경썼죠. 시각적으로 다양한 비주얼, 선수 간의 갈등, 레이스의 변형 등 어떤 포인트를 어디에 배치해야 진짜 마라토너와 함께 달리는 심정으로 감상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생동감 넘치는 장면을 위해 필수적이었던 배우들의 마라톤 트레이닝 역시 큰 과제였다. 특히 임시완은 철저한 식단 관리와 운동을 통해 실제 서윤복과 비슷한 체구를 만들었고, 프로 선수 못지않은 고강도의 훈련까지 소화했다. 강제규 감독은 "하정우, 임시완 두 배우 모두 실제 인물들과 싱크로율 100%였다"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늘 마라톤 영화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손기정 선생님의 모든 게 제 안에 입력돼 있었는데 가장 일치한 배우가 하정우 씨였어요. 키부터 덩치, 걸음걸이까지 타고난 외적 조건이 상당히 비슷해서 바로 결정했어요. 임시완 씨는 '미생',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때부터 눈여겨본 배우였어요.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당차고 섬세한 연기가 나올까, 대단한 친구네' 싶었거든요. 선수로서 투지가 강했던 서윤복 선생님도 실제 선비 같은 성품이셨다고 해요. 그런 면도 배우와 닮아서 굉장히 만족한 캐스팅이었습니다."
지난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화려하게 데뷔한 강제규 감독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마이웨이'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챙긴 흥행작들로 오랜 시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국영화계를 대표할 만한 상징적인 연출가이자 베테랑인 그에게도 최근 몇 년 새 완전히 달라진 극장가 상황은 낯설기만 하다. 팬데믹 사태, OTT 플랫폼의 성장 등의 이슈를 거치면서 극장을 찾는 관객 수는 크게 줄었다. 영화 산업을 둘러싼 우려가 깊어지고 있는 지금, 강제규 감독은 "위기는 늘 있었다. 관객이 푹 빠질 만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10%일 때부터 영화를 시작한 사람이라 명암을 너무 잘 알죠. 어릴 땐 '어떻게 해야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당당할 수 있을까' 무슨 독립투사처럼 고민하곤 했어요. 그러다 운 좋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고, 위기도 있었죠. 제가 '은행나무 침대' 때도 했던 얘긴데 팝콘을 들고 와서 못 먹고 나가는 영화를 만들어야 해요. 관객의 2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아서 숨 쉴 틈 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것, 그게 영화가 살길입니다. OTT나 드라마와는 견줄 수 없는 2시간의 미학, 영화만의 특권을 보여주는 콘텐츠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이미 시장 구조는 바뀌었죠. 예전과 똑같이 숫자를 맞추려 하지 말고 총 제작비 대비 어떤 선순환 구조를 만들지, 그걸 더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eun@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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