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종이 가위 - 책 표지 장인의 자기 세계 구축법[시네프리뷰]
2023. 9. 13. 07:10
일본의 장서디자인 전문가 기쿠치 노부요시. 영화는 모리스 블랑쇼의 <끝없는 대화> 표지 디자인을 맡은 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연필, 종이, 자, 칼…. 철저하게 아날로그 방식이다.
제목 책 종이 가위(Book-Paper-Scissors)
제작연도 2019
제작국 일본
상영시간 93분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히로세 나나코
출연 기쿠치 노부요시, 이사오 미토베, 후루이 요시키치
개봉 2023년 9월 13일
등급 전체 관람가
기획/제작 분복(分福·고레에다 히로카즈 제작사)
수입 ㈜디오시네마, 게이트식스
배급 ㈜디오시네마
공동 배급 게이트식스
책 표지 디자인에 관한 한, 필자는 문외한이다. 가끔 SNS에서 친구를 맺고 있는 출판업계 지인들이 올리는 글, ‘이런저런 신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다음 중 어떤 표지가 제일 어울리는 것 같습니까?’ 같은 질문과 함께 제시하는 책 표지 예시 중 정답-이 경우, 가장 많은 ‘페친’이 선택한 표지-를 맞춘 적이 거의 없다.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책 표지 장인
기쿠치 노부요시(菊地信義)는 일본의 대표적인 장서디자인 전문가다. 영화에서 회고에 따르면 1만 권이 넘는 단행본이나 전집 표지가 그의 손을 거쳤다.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히로세 나나코 감독이 약 3년에 걸쳐 어떻게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지 그의 작업과정과 일상, 철학을 담고 있다. 놀랍게도 그가 표지 장정을 만드는 방식은 거의 철저하게 아날로그 방식이다. 연필로 그리고 종이, 자, 칼을 사용해 자르며 접고 붙이는. 영화의 원제는 <쯔쯘데, 히라이테(つつんで、ひらいて)>, 그러니까 ‘싸매고 풀어주고’ 정도의 뜻인데 개봉 제목 <책 종이 가위>는 아마도 부산국제영화제에 이 영화가 소개되면서 의역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출판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모종의 노스텔지어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밥벌이로 이쪽-출판 관련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자취를 감췄지만, 대학교 저학년 때는 아직 개인용 컴퓨터(PC)의 개념조차 없을 때라 유인물이나 회지나 문집 같은 것을 만들 때 철심으로 동판을 긁어 잉크 롤러로 미는 작업 같은 걸 하곤 했다. 대학 고학년이 되면서 컴퓨터 사용이 보편화했을 때도 여전히 ‘아날로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컴퓨터 문서편집기는 ‘단’을 구현할 수 없어 모눈종이에 프린터로 출력한 문단들을 가위로 오려 잘라 붙여 기획사에 넘기는 식의 작업이었다.
물론 영화에서 묘사하는 기쿠치 노부요시의 작업이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가 구상해 내놓는 프로토타입을 바탕으로 30년 넘게 그와 손발을 맞춘 여성 작업자가 옆방에서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구현해주고 있다. 표지 장정 디자인 작업은 예술에 가깝다.
영화에서 그는 모리스 블랑쇼의 책 <문학의 공간>과의 만남이 북디자인이라는 길에 들어선 계기라고 밝히고 있다. 영화는 50년 후 다시 일본에서 출판된 모리스 블랑쇼의 책 <끝없는 대화> 표지 디자인을 그가 맡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과 별개의 예술작업이라고 하지만, 기쿠치 노부요시 같은 장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자신의 작업에 녹인다. 예컨대 왜 <끝없는 대화>의 일본어판 겉표지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하얀색 수제 화지(和紙·자막 번역은 편의상 한지로 돼 있는데 일본에서는 자기들 고유의 전통물건이라고 주장하는 물건에 화(和)를 붙여 사용한다)를 사용했을까. 출판사 측과의 회동에서 기쿠치 노부요시는 이렇게 언급한다. 모리스 블랑쇼가 마그리트 뒤라스(우리에게는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1992)의 원작자이자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의 각본으로 알려진)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가 50세였고 뒤라스의 나이가 41세였다. 책 표지는 뒤라스의 피부이고, 타이포그래피에 사용된 와인빛의 선택은 뒤라스의 란제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어느 정도는 반농담에 가까운 말이지만 책으로 주고받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주변부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뜻풀이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장인의 회고
1만 권 넘게 책 표지를 만들면서 그가 내놓은 회고가 “성취감 같은 것은 없고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건 뜻밖이다. 마르크스가 내놓은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의 여섯 번째는 “인간적 본질은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는 것이었다. 그가 점점 자신이 텅 비어져 간다는 것을 느낀다고 고백할 때, 자아는 육체적 경계를 넘어 자신이 만들어낸 책표지들로 확장됐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는 2019년 제작됐다. 한국에서는 4년 늦게 개봉하는 셈이다. 기쿠치 노부요시의 근황이 궁금해 일본 쪽 자료를 찾아보니 지난해 3월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짤막한 보도만 나온다.
일본의 장인문화, 초밥 장인 오노 지로의 경우
언젠가 일본의 유명 장서인 한 디자인전문가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그 기억이 누누이 떠올랐다. 꽤 화려한 총천연색 책이었다. 묵직한 질감이 기억의 편린으로 남아 있다. 할 수 없이 몇 가지 단서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그 책의 주인공은 기쿠치 노부요시가 아니었다. 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 책 제목은 <스기우라 고헤이의 북디자인 반세기>였다.
일본의 장인문화는 유명하다. 예컨대 지금도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있는 <지로의 꿈>(2011·포스터)의 주인공 오노 지로는 초밥 장인이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식당업계에 뛰어들어 1969년 긴자에 자신의 초밥집을 열었다. 1925년생이니 영화가 공개됐을 때는 이미 86세의 노인인데도 여전히 그는 매일매일 초밥 만들기에 정진 중이다. 미각을 잃지 않기 위해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거나, 초밥을 쥐는 손을 보호하기 위해 외출 때 반드시 장갑을 낀다는 등의 일화가 알려져 있다. 오바마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지난해 고인이 된 아베 신조와 초밥을 먹은 가게로도 유명하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미 2007년부터 ‘미쉐린 가이드’의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받았는데도 가게는 초라하게도 긴자 지하철역 지하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에서 역시 셰프인 아들이 가게 밖에 숯불을 내놓고 김을 굽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기 가게 위치가 지하이니 저러면 환기가 안 될 텐데…’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있으니 영화를 찍고 얼마 안 돼 돌아가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리뷰를 쓰면서 다시 확인해보니 부고 소식은 없다. 올해로 97세다. 그는 지금도 긴자역 지하 가게에서 초밥을 쥐고 있을까. 스키야바시 지로 음식점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어 들어가 보니 “2월, 3월은 만석이 되어 예약을 받을 수 없다”는 올해 2월 8일자 공지가 최신 글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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