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유방암으로 하늘나라 간 25세 딸…치료과정서 후회되는 두가지

윤근영 2023. 9. 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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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 먹거리 학교를 운영하는 이계호 박사의 인터뷰 기사는 분량이 많아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오늘 기사는 첫 번째이며, 조만간 두 번째 기사가 송고될 예정입니다.]

이계호(70) 박사는 태초 먹거리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2010년 태초 먹거리 학교를 세워 그들을 대상으로 건강 교육을 시작했다.

-- 태초 먹거리 학교를 세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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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발병원인 제거, 면역력 회복ㆍ유지해야 재발ㆍ전이 없어"
"대형병원 암 표준치료후 환자 관리시스템 부실"…이계호 박사

[※편집자 주= 태초 먹거리 학교를 운영하는 이계호 박사의 인터뷰 기사는 분량이 많아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오늘 기사는 첫 번째이며, 조만간 두 번째 기사가 송고될 예정입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계호 박사 [촬영 이다빈]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생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기쁨만을 주었던 사랑하는 나의 딸, 25년의 짧지만 빛나는 생을 마감하면서 아빠의 품에 안긴 채 남겼던 마지막 말은 감사합니다"

이계호(70) 박사는 태초 먹거리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깊은 아픔이 있다.

14년 전인 2009년에 딸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유방암으로 숨졌다. 수술한 지 3년 만에 온몸으로 전이됐다.

그는 딸을 살리기 위해 전 세계의 논문을 뒤졌다. 민간요법으로 생존한 암 환자가 있으면 세계 곳곳에 직접 찾아가 배웠다. 지인들이 특효약이라고 알려주면 뭐든지 시도해봤다.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후회되는 일 두 가지가 있다. 딸이 표준적 치료를 마친 후 1년 정도의 면역력 회복 기간이 필요한데, 이를 모르고 복학을 막지 못한 점, 특효약과 민간요법을 찾고 적용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한 점이었다.

딸을 보낸 그에게 이런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암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2010년 태초 먹거리 학교를 세워 그들을 대상으로 건강 교육을 시작했다.

그를 지난 6일 충북 옥천에 있는 태초 먹거리 학교에서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종합병원들에 암 환자가 넘쳐나는데, 병원 측은 환자들의 재발과 전이를 막기 위한 수술 후 관리시스템을 운영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돈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은 암 관리가 부실한 나라에 속한다"라고 말했다.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영남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분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충남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2000년에 한국분석기술연구소라는 벤처기업을 만들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2010년에는 충북 옥천에 태초 먹거리 학교를 열어 건강 전도사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과거 탄광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어디서 태어났나.

▲ 3남 1녀 중 장남으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

▲ 아버지는 미곡상을 하시다 광산에 투자하는 바람에 파산했다. 빚쟁이에 쫓겨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신 뒤 송파구 가락동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셨다.

-- 아버지가 투기적 성향이 있었나.

▲ 그런 분은 아니었다. 당시는 강원도 광산에서 임금을 쌀로 주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광산에 쌀을 공급했으나 탄이 나오지 않아 돈을 받지 못했다. 빚쟁이가 매일 찾아왔기에 대구에서 살 수 없었다.

-- 부모님은 서울로 가신 뒤 가정 경제에 도움을 못 줬나.

▲ 맨손으로 올라가셨으니 본인들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날품팔이 일꾼 노릇도 하면서 매우 어렵게 생활하신 것 같다. 부모님은 서울에 계시다 부산으로 내려가 과일 장사를 하셨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계호 박사 [촬영 이다빈]

-- 본인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나.

▲ 나는 고교 3학년 1학기를 중퇴하고 세차장에서 일했다. 3명의 동생과 할아버지가 집에 있었는데, 일단 먹고 살아야 했다. 세차장은 친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차에 기름치는 일도 했다. 이런 생활을 2년 정도 했다.

-- 생활이 아주 어려웠나.

▲ 매일 봉지 쌀을 사 먹어야 했다. 굶는 날도 많았는데, 그런 날은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그 시절 나는 세상을 저주했다. 나와 비슷한 실력의 친구들은 유명 대학에 진학했지만, 나는 세차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힘들었다.

-- 2년 후에는 무슨 일을 했나.

▲ 과외를 했다. 처음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산수를 가르쳤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으로 대상을 옮겨갔다. 자취방에 탁자를 놓고 8∼1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나는 유능한 교사로 소문이 났다. 과외 1시간을 위해 1주일 전부터 영어 본문, 수학 문제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책을 안 보고 본문을 칠판에 그대로 쓰니 아이들과 어머니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았다. 수입도 괜찮았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이계호 박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본인 제공]

-- 대학교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 내가 몸이 아플 때는 대타 강사를 투입해야 했다. 그 대타 강사가 나의 친구였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그 친구 집에 세 들어 살았기에 거의 한집에서 자랐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내가 과외를 할 때 그 친구는 영남대학교 화학과 학생이었다. 그 친구는 대타 강사로서 아이들에게 대학에서의 미팅, 커리큘럼 이야기를 했다. 대학에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자존심이 상했고, 부럽기도 했다. 자극받은 나는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졸업 자격을 얻었고, 친구가 다니는 영남대학교 화학과에 들어갔다.

-- 왜 화학과에 들어갔나.

▲ 경북사대 부속 중학교 2학년 때 경북지역 과학경연 대회에 나가서 3등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과학에 소질이 있는 줄 알고, 과학자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졌다. 게다가 화학과에는 내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학과에 들어가 그 친구와 학점 경쟁을 했다. 그 친구가 학점 3.5 점을 받으면 나는 적어도 3.6 점은 받아야 했다. 그 결과, 우리 두 사람은 영남대에서 기록적인 학점 수치를 갖고 있다.

-- 유학은 왜 가게 됐나.

▲ 취업이 어려웠다. 4학년 때 취업을 위해 기업체에 원서를 내면 서류전형에서 매번 탈락했다. 학점은 매우 좋았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걸림돌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 중인 친구로부터 이공계로 유학 오면 학비와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논산훈련소 훈련병과 조교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그전에 군대는 갔다 왔나.

▲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생활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어떤 점에서 위험했나.

▲ 나는 대학교 시절에 대구 시내 막걸릿집, 맥줏집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후 8시부터 30분간, 오후 10시부터 30분간이 무대에 오르는 시간이었다. 저녁 내내 과외를 하는 것보다 수입이 좋았다. 무대 활동 중간에 공부할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술을 먹게 됐고, 공부도 멀리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입대를 결정했다. 잘못된 생활을 끝내기 위한 것이었다.

-- 연예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 나한테도 팬이 있었다. 술집을 옮겨 노래를 부르면 나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가수를 직업으로 선택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의 흥을 돋워주는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전문 가수로서 자질은 없다고 생각했다.

-- 군대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 생활을 마친 뒤 이 훈련소 조교로 차출됐다. 내무반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대위 한 사람이 와서는 행정병으로 근무할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나는 그 대위에게 나를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군대에 왔는데, 훈련병 조교 생활을 하면 그런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된다고 하소연했다. 그 대위는 이병 주제에 건방진 말을 한다면서 나를 혼냈다. 나는 행정병으로 뽑혔다.

-- 군대 생활은 어떠했나.

▲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빗자루질할 때도 단어장을 들고 영어단어를 외웠다. 고참들은 단어장을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구타했다.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손바닥에 영어단어를 써놓고 외웠다. 6개월가량 지나니 영어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구타당하지 않았다. 이때 영어 공부한 것이 유학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젊은 시절의 개그맨 이용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 군대 생활 에피소드가 있다면.

▲ 코미디언 이용식이 군대 동기다. 나는 훈련소 본부 인사처 소속이었는데, 그 옆 정훈부에 그가 있었다. 그 부대는 연예인 생활을 하다 입대한 사람들로 이뤄졌고, 훈련병에게 위문 공연을 해주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이용식은 그때도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연대 내 주방들을 돌고 오면 그날은 회식 날이었다. 이용식은 친화력이 좋아서 주방장들로부터 닭고기, 라면 등을 한 보따리씩 얻어왔다.

-- 이용식과 친하게 지냈나.

▲ 그렇다. 그도 나이 들어 군대에 들어왔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정이 있었다. 그때 이용식은 괴로워하는 일이 있었다. MBC 개그맨 후배가 먼저 정훈부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용식은 나이도 어린 그 후배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그는 나와 함께 보초를 설 때 이를 푸념하곤 했다.

-- 그때 정훈부에 다른 연예인은 없었나.

▲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이 병장이었다. 나는 맨 아래 졸병이었고, 그는 제대를 앞둔 병장이어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계호 박사 [촬영 이다빈]

-- 건강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 딸이 25세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왜 암에 걸리는지, 암을 예방할 방법은 없는지, 재발을 막을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 딸은 언제 발병했나.

▲ 서울에 있는 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 다니던 딸이 22세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딸은 수술을 비롯한 표준치료를 신속히 끝내고 곧바로 대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딸의 빠른 복학을 막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 역시 복학해도 된다고 했다.

-- 복학한 이후에 또 문제가 생긴 것인가.

▲ 딸은 이전 생활로 되돌아갔다. 졸업작품을 만드느라 밤을 새웠고,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취업 준비를 하느라 동영상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면접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렇게 딸은 졸업했지만,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것이 확인됐다.

태초 먹거리 학교에서 이계호 박사와 수강생들 [본인 제공]

-- 너무 빠른 복학이 문제였나.

▲ 복학을 늦추고 1년 정도의 면역력 회복 기간을 가져야 했는데 의사도 그런 이야기를 안 했고, 나도 그걸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전이된 후에 치료는 불가능했나.

▲ 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의과대학의 공부를 독학했다. 전 세계 암 병원의 치료 방법을 다룬 논문을 파고들었다. 전 세계에서 병원이 포기한 암 환자가 민간요법으로 나았다고 하면 직접 그곳에 가서 그 방법을 배워 딸한테 시도했다. 불행히도 물거품으로 끝났다.

-- 딸은 어떤 사람이었나.

▲ 심성이 착하고 선이 굵었다. 항암치료를 위해 주삿바늘을 꽂을 때 간호사가 혈관을 잘 못 찾는 경우가 있다. 여러 번 항암치료를 하다 보니 주삿바늘을 꽂을 혈관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짜증을 낼 법도 한데, 딸은 괜찮다면서 간호사를 위로했다.

-- 아빠를 위로하는 말도 했나.

▲ 암 환자는 체중이 줄면 안 된다. 자꾸 몸이 말라가는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아서 내가 화를 내면 딸은 "노력하고 있어요. 화내지 마세요"라면서 나를 위로했다. 통이 크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였다.

-- 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 본인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 딸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 우리 딸은 나한테 애교를 부린 적이 없다. 선 머슴애 같은 성격이었기에 그렇다. 나는 젊은 시절에 공부하고 연구하느라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그게 아쉽고 후회됐다. 그래서 내가 딸한테 애교를 떨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딸은 그걸 멋쩍어하면서도 잘 받아줬다.

태초 먹거리 학교 앞에 선 이계호 박사 [촬영 이다빈]

-- 태초 먹거리 학교를 세운 이유는.

▲ 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했다. 너무 많이 실수했고, 엉뚱한 짓을 많이 했다. 주변을 보니 다른 암 환자들과 그 가족들도 우리 집과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2010년 7월에 암 환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딸이 하늘나라로 간 지 1년 만이었다.

-- 태초 먹거리 학교에서는 주로 무엇을 다루나.

▲ 암이 일어나는 원인과 치유과정을 다룬다. 건강한 먹거리도 이곳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다. 청소년들은 엄마가 만든 김치는 안 먹어도 이곳에서 자기가 만든 백김치는 먹는다.

-- 주로 어떤 사람들이 오나.

▲ 처음에는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가 암 환우들이었다. 이제 암 환우는 30% 정도 되고, 70%가 건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다.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는 가족도 있다. 스님, 신부님도 오신다. 젊은 층이 의외로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태초 먹거리 학교에서 알게 됐다.

-- 태초 먹거리 학교의 비용은.

▲ 운영에 따른 비용은 내가 세운 한국분석기술연구소로부터 후원받고, 내가 쓴 책 '태초 먹거리' 인세 수입으로 충당한다. 그 책은 13만 권이 팔렸고, 현재 '태초 먹거리 2'를 준비 중이다.

눈 올 때 태초 먹거리 학교의 모습 [본인 제공]

-- 태초 먹거리 학교에 오시는 분들에게는 여러 가지 사연이 많을 텐데.

▲ 어느 대기업의 부장은 매년 건강검진을 했는데, 검진 후 6개월 만에 담낭암이 발견됐다. 간과 폐로 전이된 상태였다. 그분은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가 뭔지 답답해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해서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면역력을 유지하면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어떤 65세 여자분은 10년 전에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는데, 지금은 요가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 암 환우 가족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나.

▲ 암 환자는 면역력이 원래의 정상 상태로 되돌아왔는지 꼭 확인한 뒤에 복직하거나 복학하라고 한다. 본인의 원래 삶 속에 발암의 요인이 있으니 그걸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급하게 복학하고 복직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다.

-- 병원들은 왜 면역력 회복에 대한 교육을 안 하나.

▲ 우리나라의 큰 병원은 암 환자 때문에 먹고 산다. 암 외의 다른 진료과목은 거의 모두 적자로 알고 있다. 암 환자에 대한 병원의 관리시스템은 부실한데,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표준치료에 대해서는 보험회사가 비용을 커버해주지만, 그 이후의 암 환자 관리프로그램에 대해서는 혜택을 주지 않는다. 암이 재발하면 병원이 또 표준치료를 해줄 뿐이다. 이런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이러니 대한민국 암 병동에는 환자가 넘치고 넘친다.

태초 먹거리 학교에서 음식을 만드는 이계호 박사 [본인 제공]

-- 암이 발생하는 이유는.

▲ 암의 후성인자는 먹거리, 생활 습관, 환경이다. 암을 극복하려면 이들 3가지를 바꿔야 한다. 이런 발병 원인이 5년, 10년, 20년 동안 반복돼서 문제가 됐는데, 이걸 고치지는 않고 병원에서 표준치료를 마친 뒤 특효약과 비법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언젠가는 전이가 되거나 재발이 될 가능성이 있다.

-- 앞으로의 계획은.

▲ 태초 먹거리 학교의 지역센터를 전국에 건설하고 싶다. 이미 제주 센터가 지난 7월에 문을 열었다. 센터장님은 제주도 보건소에서 소장을 지내신 분이다. 제주센터는 산후조리원이었던 곳인데, 어떤 분이 기부를 해주셨다. 이밖에 2∼3곳이 지역센터를 준비 중이다. 나는 지역센터를 담당할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2박 3일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숙박이어서 실비 정도만 받고 교육하고 있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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