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비상계엄' 시대, 학생운동 서클 선후배들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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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학하기 한 해 전에 호적지인 경기도 가평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난 후 이미 입영통지서를 받아놓은 바 있어, 입학한 해인 여름에 육군에 입대해야 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자 의정부 제3보충대를 거쳐 중부전선의 최전방 '철의 삼각지대' 백골부대 3사단 보충대에서 첫날밤을 잤다.
밤이 되자 어둠 속 밤하늘에서 갑자기 북한의 대남방송이 남한의 대북방송과 섞여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최전방 일선이로구나!’ 실감이 났다. 전선의 밤기운에 갑자기 마음이 옭죄어졌다.
연대가 소속한 사단은 최전방 철책선에 붙어 '철의 삼각지대' 일대를 방어하는 전투부대였다. 제대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에도 청와대를 기습하려는 김신조 일당 사건으로 제대가 무기한 연장되었다. 가까스로 제대 통보를 받으니 어찌나 마음이 가뿐하던지. 그렇게 2년 8개월 동안의 계급사회 졸병생활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도 한 순간, 집에 들러 어머니 아버지에게 인사드리고 난 후 곧바로 종로5가 문리대로 가서 복학수속을 마쳤다. 때는 라일락꽃 향기 짙은 4월이었고, 키 높은 마로니에도 새싹이 움터나는 때였다. 하지만 다시 학생의 자리로 돌아와 지내보니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경제는, 사회는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 치하의 '혼자' '많이 가진' '기득권 세력들'의 독무대였다. 권력과 돈은 철저히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 이익과 배치되는 세력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라 해도 철저한 적이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우리들 학생의 자리, 국민의 자리, 서민의 자리, 민중의 자리, 노동자와 농민의 자리는 사회 그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복학한 뒤부터 나는 강의실 공부보다는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이념 한 가운데로 섞여 들어갔다. 이미 4학년이 된 입학 동기들은 졸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운동 그룹에 몸담은 동급생들은 물론이고 2~3학년들도 제대해 다시 1학년으로 복학한 나를 형이라 불러주었다. 3학년 그룹의 김세균, 한종범 등, 2학년 그룹의 유인태, 최재현, 서중석, 김형관, 안양로, 유초하 등, 1학년 그룹의 이철, 장성효, 손예철 등, 그 아래 그룹인 손호철, 김효순, 한석태 등과 한 몸처럼 어울려 지냈다.
이들과 함께 노래했고, 이들과 막걸리를 섞었고, 방학 때면 후배들 모임의 일원이 되어 도시 서민들의 생활, 농촌 농민들의 생활, 공장과 광산 노동자들의 생활 현장을 파고들었다. 노동과 생활 현장에서 그들을 보려했고, 그들의 아픔과 고뇌를 함께 하려 했고, 그들의 삶의 눈으로 책을 보았다.
가진 나라 미국보다는 대륙 인민의 나라 중국을 보았다. 베트남의 호지명(호치민)을 보았고 유고의 티토를 보았고, 쿠바의 카스트로를 보았고. 소련도 보았고, 영국 프랑스 독일 정치사 속의 시민혁명 운동도 다시 들춰보았다. 경제의 역사도, 정치사상도 꼼꼼히 되짚어 읽으며 세계를 보았다.
엄혹한 폭압의 시절이었기에 이불을 덮어쓰고서야 전등 불빛으로 김지하 시인의 '5적', 신동엽 시인의 '금강', '껍데기는 가라'를 소리죽여 읽었다. 오적은 을사조약 다섯 매국노를 빗대어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가리켰다, 시대는 박정희의 비상긴급조치로 학생끼리 붙어 다닐 수 없던, 독재가 시대를 뒤덮던 바로 그 시대였다. 김지하 시인을 알고부터 나는 시인을 '지하 형'이라 불렀다.
지금은 열 명의 후배들이 우리 곁을 떠나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모두가 몸 붙여 가까이 지내던, 서울 문리대 학생운동에서 뜻과 행동을 같이 하던 정 넘치는 후배들이었다. 사회학과 최재현을 시작으로, 사회사업학과 박순식, 정치학과 김형관, 사회학과 주영길, 정치학과 서원석, 정치학과 제정구, 무소속 임호빈, 물리학과 박종우, 사학과 장경옥, 정치학과 유초하 등. 모두가 착하고 곱고 아름답고 유쾌한 심성을 지닌 정의파 열혈 청년들이었다.
박정희는 민주를 향한 우리 민주민중 학생운동의 길목마다 툭하면 위수령, 툭하면 비상계엄령, 때로는 국가비상사태라는 명목으로, 또한 휴업령, 휴교령, 조기방학으로 대학과 사회 분위기를 옭죌 대로 옭죄었다. 대학에는 국가정보원과 사복형사가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급기야 문리대 대운동장에도 병영이 설치되고, 문리대 자유와 낭만의 상징 마로니에 밑에도 탱크가 들어와 마치 예전부터 그곳이 제자리인 양 했다. 대학문이 닫히면 대학가에는 대학의 주인이어야 할 대학생들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자유와 정의와 낭만과 진리가 춤추는 곳이 아니라, 총검을 거머쥔 군인들의 주둔지가 된 대학! 대학생 군사훈련장으로 변해버린 대학의 운동장, 누가 이렇게 했더란 말인가? 군인과 중앙정보부 정보경찰은 서울 10개 대학 교내에 남아있던 1600여 명의 대학생을 총검으로 연행하고 이들 중 200여 명을 가려내 대학에서 제적하고 A.S.P(Anti-Government Student Power)라는 딱지를 붙여 군대에 넣어 전방부대에 배속시켰다.
복학 전 해인 1967년 5월 치러진 대선에서 부정선거 규탄 데모에도 불구하고 51%를 얻은 박정희가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어 치러진 6월 총선도 부정선거로 134석을 얻은 박정희 공화당의 압승으로 삽시간에 개헌 방어선이 무너졌다. 박정희와 박정희 세력이 헌법상 대통령을 2선까지만 연임할 수 있도록 한 규정을 지워내고 장기집권을 위한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가 없었다. 대통령 연임 제한규정을 뭉개고 3선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개헌! 국회 134석은 개헌선을 넘어선 바로 그 접점이었다.
부정선거 부정축재, 그리고 군사교련을 거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는 또다시 전가의 칼 위수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탱크를 앞세워 대학가에 무장군인을 진입시켰다. 이것이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대한민국 최고 지성의 산실의 모습이었다. 툭하면 위수령, 계엄령, 툭하면 비상조치에 연이은 긴급조치들! 지성의 산실인 대학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과 그 헌법정신은 박정희 탱크와 총검, 무소불위 안기부의 절대적인 힘으로 철저하게 유린되었다.
보안사령부와 중앙정보부는 지옥불의 대명사였다. 대통령 위에도 아래도 국민은 없었다. 오직 박정희 그 무리 하나 뿐. 국민들은 입은 있어도 들끓는 마음 뿐 말이 없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노동자의 단결, 단체교섭, 단체행동 등의 권리는 오로지 헌법에만 명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1971년 10월 19일. 163명이 제적돼 강제 입영되고 1만2781명이 병무신고 돼 하늘아래 나부끼던 대학가 출판물들은 압수 폐간되고 학내 서클이 강제 해체되었다. 곧이어 12월 8일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데 이어 12월 27일 새벽 3시 국회 외무위원회 회의실에서 공화당과 무소속만으로 무소불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정당화시키는 한편, 1인 권력을 강화함으로서 대통령 박정희가 10개월 뒤 유신체제로 들어설 발판을 마련하였다.
특별조치법에는 언론 출판 집회 시위에 관한 통제는 물론 헌법상의 국민이자 노동자의 권리로서 보장받고 존중되어야 할 노동3권 중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에 관한 단속과 통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군부와 정보부는 무소불위 세상에 못할 일이 없는 만능의 존재였다.
이듬해인 1972년은 무슨 해인가? 10월 17일,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또다시 국민들의 입과 발을 묵고 눈과 귀까지 막은 채 국회를 해산하고 언론출판을 검열하는 등 유신을 선포했다. 유신개헌으로 국민이 뽑아야 할 대통령은 국민 동의도 없이 지역유지들 중에서 뽑혀 올라온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만 참석해 박정희 사회로 박정희를 만장일치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국회마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지명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주축으로 하여 구성됐다. 모두가 대통령의 꼭두각시인 여당일색. 소수의 야당 국회의원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국회는 독재자 박정희와 그 일맥들 장기집권 음모를 위한 집결장으로 자리잡았다. 유신독재 먹구름이 대학가에도 내려덮인 것이다. 부산이든 서울이든 인천이든 언제나 대학생 데모는,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자의 항거는, 쌀값을 올려달라는 농민의 부르짖음은 비상계엄령으로 무너지고 갇히고 고통받기 일쑤였다.
타오르는 분노는 지방대학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대구에서 부산에서 마산에서 광주에서, 대학이 있는 곳이면 대학마다, 거리마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졸업 때까지 문리대 학생운동 본류에 몸담고 있었다.
<계속>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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