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풍경] 손 뻗으면 북녘 땅… 그 섬의 시간은 더디고도 빠르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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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만큼 보이는 사람, 마을, 자연. 매주 수요일 여행 감성을 자극하는 풍경을 찾아갑니다.
강화군 교동도를 가리켜 흔히들 ‘시간이 멈춘 섬’이라 일컫는다. 그 중심에 대룡시장이 있다. 한국전쟁 때 피란 온 황해도 연백군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잠시 머물 거라 생각했는데 70년이 훌쩍 흘렀다. 임시 거처로 여겼으니 집들이 튼실할 리 없고, 마을의 짜임새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허름하게 낡아가던 시장 풍경이 입소문을 타며 복고 감성 여행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행객의 발길이 늘어나자 강화군은 올해 화개정원과 전망대를 새로 개장했다. 멈춘 것 같았던 교동도의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저기가 진짜 북한이라고?”
교동도는 섬의 절반이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최전방이다. 외부인이 섬에 들어가려면 간단한 입도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교동대교 바로 앞 검문소에 세워진 큐알(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인식하면 민통선 출입증 발급을 위한 온라인 페이지가 열린다. 인적 사항과 차량번호를 입력하면 바로 ‘당일출입증’이 발급된다.
다리를 건너 대룡시장으로 직진하다 보면 왼편으로 화개정원 이정표가 나타난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화개산(259m) 북측 경사면을 정비해 지난 5월 개장했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탐방로를 걸어 오르면 산꼭대기의 화개산전망대에 닿는다. 걷는 게 불편하면 모노레일(왕복 1만2,000원)을 이용할 수 있다.
화개정원(입장료 5,000원)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작은 초가가 눈에 들어온다. 재현한 연산군 유배지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수많은 신진 사대부를 죽음으로 내몰고, 생모 윤씨 폐비에 찬성한 수십 명을 살해했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그는 결국 교동도로 유배돼 두 달 후인 1506년 11월 생을 마감한다. 유배지 초가는 날카로운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로 둘러져 있다. 맘대로 권력을 휘두르다 위리안치라는 형벌에 처해진 폭군의 말로가 처량하다.
강화도는 1,000여 년 동안 왕과 왕족의 유배지였다. 바로 옆 유배문학관에는 연산군뿐만 아니라 강화도와 교동도로 유배당한 왕족과 그 사연을 나열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희종·고종·우왕·창왕이, 조선시대에는 연산군과 광해군을 비롯해 안평대군·임해군·능창군·경안군 등이 강화도로 유배됐다. 고려의 수도 개경,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가까운 섬이다. 제주도나 전라·경상도의 외딴섬까지 보내지는 않은 건 그나마 왕족에 대한 배려였던 듯하다.
유배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물의 정원, 역사·문화의 정원, 추억의 정원, 평화의 정원, 치유의 정원 5개 테마로 구성된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교동도의 역사와 자연을 담은 정원”이라 자랑하지만 아직 짜임새가 허전하다. 풀과 나무는 공장에서 찍어내지 못한다. 정원은 자연을 대하는 미적 감각에 인간의 섬세한 손길과 시간이 더해져 완성된다. 개장한 지 불과 4개월 남짓 하니 나무 그늘은 부족하고 꽃밭도 소담스럽지 못하다. 계곡물을 활용한 몇 개의 폭포와 작은 분수, 그리고 곳곳에 설치한 쉼터와 벤치가 그나마 위안이다.
화개정원의 진면목은 탐방로와 쉼터에서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광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교동도의 들판과 한강으로 연결되는 좁은 바다, 그 너머 북녘의 들과 산줄기가 점점 넓게 조망된다. 바둑판같은 들판과 그 사이에 옹기종기 들어선 마을, 강과 바다와 갯벌과 저수지가 진짜 정원이다.
화개산전망대에 오르면 전망은 정점을 찍는다. 두 날개에 부리가 돌출한 모양의 전망대는 강화군의 군조인 저어새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머리에 해당하는 투명유리 스카이워크가 아찔하다. 전망대 끝에 서면 임진강, 예성강이 합류해 바다와 만나는 한강, 그 너머로 북한의 들녘이 손에 잡힐 듯하다.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기수역에는 넓게 갯벌이 형성돼 있다. 기름진 갯벌과 바다에는 그러나 어선 한 척 보이지 않는다. 풍성한 어장을 코앞에 두고 남북 주민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다. 인기척 없는 물줄기를 따라 나른하고 팽팽한 긴장만 흐른다. 교동도 들판도 북녘 연백평야도 서서히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다. 계절은 남북을 가리지 않는데 시절은 자꾸만 서로 멀어지는 듯하다.
“저기가 진짜 북한이라고?” 전망대에 선 방문객마다 감탄사처럼 한마디씩 던진다. 바다 폭이 좁은 곳은 2.4km에 불과하니 눈앞의 북녘 땅이 실감 나지 않는다. 고향 땅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눈에 담으려는 실향민들이 많이 찾는데, 모노레일 정류장 옆에 2개의 망원경이 있다. 500원 동전을 넣으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공원 입장료에 모노레일 탑승료까지 냈으면 이 정도는 그냥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르신을 모시고 전라도에서 왔다는 한 여행객이 불평을 쏟아냈다.
화개산은 위에서 보면 솥뚜껑을 엎어 놓은 모양이라 한다. 화개정원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 솥뚜껑 조형물이 보인다. 스탬프 투어 앱(조인나우)으로 8개 중 6개 이상을 인증하면 입구에서 500g짜리 강화 쌀을 받을 수 있다. 교동도의 넓은 평야는 간척으로 형성된 들판이다. 3개의 큰(?) 섬과 주변 작은 섬을 잇는 간척사업이 고려시대부터 진행돼 조선 후기에 현재의 해안선이 갖춰졌다 한다.
섬에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곳은 북측 해안 언덕의 ‘교동도 망향대’다.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피란 온 주민을 중심으로 결성한 비봉회 회원들이 1988년 세운 전망대이자 제단이다. 북에 남아 있는 부모 형제 친지 친구와 고향 산천을 그리는 마음을 담았다. 망향대에서 북한 땅까지 직선거리는 약 3km로 연안읍의 진산인 비봉산과 남산, 드넓은 연백평야가 눈에 밟힌다. 머지않아 고향 땅을 다시 밟아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쌓았지만 현실은 가슴 아픈 분단의 현장이다.
지난 7일 오후 두 딸의 도움으로 망향대를 찾은 김순섭(94) 할머니는 북녘 땅을 하염없이 응시하다 끝내 엉엉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할머니는 1·4후퇴 때 흥남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내려왔다. 고향은 함경도 성진, 엄밀히 따지면 같은 북한 땅이라는 것을 빼면 황해도 연백과 아무 상관이 없다. 고향을 그리는 애끓는 심정은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다. “이제 다 글렀어. 죽으면 영혼이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어. 그거는 되겠지.” 하릴없이 흘러버린 시간이 원망스럽다.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다.
망향대에는 할머니 같은 실향민과 가족들이 많이 찾는다. 그러다 보니 섬 마을의 좁은 골목이 몸살을 앓는다. 지석리 마을부터는 내비게이션 안내를 무시하고 현장 안내판에 따라 우회하는 길을 이용해야 한다.
이발관 제비집은 그대로… 관광시장으로 변한 대룡시장
시간이 멈춘 곳, 대룡시장도 외지인의 발길이 늘며 관광시장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낮은 처마와 좁은 골목은 여전하지만 여행객의 기호에 맞춘 먹거리 골목으로 변신한 모양새다. 그래도 명패만은 그대로여서 복고 감성이 물씬 풍긴다.
추억의 영화 포스터가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교동극장’은 식당 겸 상점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식탁을 가운데 두고 참기름과 고추장, 모자와 스카프, 수제 꽃신과 건빵까지 온갖 물품을 팔고 있다. 말하자면 복합쇼핑센터다.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슬레이트 지붕의 궁전다방은 ‘청계란·오골계 알로 만든 전통 쌍화차’를 팔고 있고, 바로 옆에는 교복차림 사진으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교동스튜디오가 자리 잡고 있다. 시장통으로 들어서면 카페로 변신한 ‘대룡철물’, 술빵과 국수를 팔고 있는 ‘교동이발관’ 등 옛 간판을 그대로 두고 업종을 바꾼 가게가 줄줄이 이어진다. 2016년 주인장이 세상을 뜨며 문을 닫은 ‘황세환 시계방’ 입구에는 추가 떨어져 시간이 멈춘 낡은 괘종시계가 걸려 있다.
교동도의 옛 중심은 대룡시장에서 약 2km 떨어진 읍내리였다. 마을에 조선 인조 때 처음 쌓았다는 교동읍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근래에 복원한 남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파란 대문 민가가 마주보고 있다. 마당에는 키 큰 감나무가 있다. 가을이 익어가는 읍성 마을 풍경이 정겹다. 인근 교동향교 앞길에도 감나무가 양쪽으로 있다. 교동향교는 고려 충렬왕 12년(1286)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국내 처음으로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는 유서 깊은 향교다.
인근에 박두성 생가가 있다. 박두성은 교동향교와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해 1926년 이른바 ‘훈맹정음(訓盲正音)’을 완성했다. 생가 마당에 세워진 흉상 뒤편으로 멀리 교동대교가 아른거린다. 그의 생가에서 조금 내려가면 월선포구다. 교동대교가 완공되기 전 강화도와 섬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항하던 포구다. 이제 한적해진 포구 언덕에 고향을 반갑게 맞았을 ‘교동도’ 표석만이 선명하다.
교동도(강화)=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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