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피의 세례’에도 투표율 95.5%… 제헌의회 선거의 기적 이끌다
1948년 1월 한국에서 선거를 실시하는 일을 주관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시리아, 프랑스, 중국, 인도, 엘살바도르,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필리핀의 8국 대표들은 인도 대표 메논을 임시의장으로 뽑았다.
메논은 하지 주한 미군 사령관과 겐나디 코로트코프 러시아군 25군 사령관에게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코로트코프는 답신하지 않았고, 대신 유엔 주재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가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하자, 이승만은 즉시 남한에서 총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미국과 러시아가 동시에 철군하고 남북요인회담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을 폈다.
위원단 안에서도 의견들이 엇갈리자, 위원단은 메논으로 하여금 유엔 본부의 지침을 받아오도록 했다. 메논은 소총회에서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네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소총회는 첫 대안인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한국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을 결의했다. 이승만의 방안에 우호적인 메논이 그 방안의 타당성을 널리 알린 덕분이었다.
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메논이 유엔 본부로 떠나기 전날,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메논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모윤숙과 메논은 연인이었다. 밤이 깊었으므로, 모윤숙은 거절했다. 이승만이 말했다.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있나?”
모윤숙은 금곡릉에 달구경 가자고 메논을 꾀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차나 한잔 하자면서 이화장으로 들어갔다. 이승만이 마당으로 뛰어나와 그들을 반겼다.
이승만이 떨떠름한 메논에게 차를 대접하는 사이, 프란체스카 여사는 모윤숙에게 한지 두루마리를 건넸다. 위원단은 한국 지도자들 200인 이상의 날인을 받은 의견서를 요청했는데, 비서의 실수로 이승만은 뒤늦게야 마련한 것이었다. 이화장을 나오자, 모윤숙은 메논에게 두루마리를 건네면서 이실직고했다.
메논이 유엔 본부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이승만은 Marion Moh(모윤숙) 명의로 열 통 넘는 전보를 쳐서 자신의 주장을 상기시켰다. 메논은 Marion Moh에게 꼬박꼬박 답신을 보내왔다. 덕분에 이승만의 주장에 비판적이었던 메논은 적극적으로 그의 주장을 소총회에 소개했다.
이승만을 깊이 관찰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월터 로버트슨이다. 일본의 항복 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세력 사이의 ‘국공휴전(國共休戰)’을 주선했는데, 당시 로버트슨은 미국 대통령 특사 조지 마셜 원수를 보좌했다. 이어 한국전쟁 막바지에 이승만이 반공포로들을 석방해서 온 세계가 경악했을 때, 그는 미국 대표로 이승만과 협상해서 사태를 깔끔하게 수습했다.
은퇴한 뒤에 로버트슨은 당시를 회고했다. “(이승만은) 모택동과 같은 종류의 헌신적이고 굳센 광신자(fanatic)였다…장개석도 그랬다.” 그리고 덧붙였다. “만일 당신이 그런 (광적인) 부분으로부터 그를 떼어낼 수 있었다면, 당신은 그보다도 더 매력적이고, 부드럽고, 점잖은 노인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장개석, 이승만, 그리고 모택동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자기 신념에 맞는 나라를 세웠다. 역사의 물결이 유난히 거세었던 20세기 전반의 동아시아에서 광신자의 풍모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 ‘미인계’로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이승만의 행적이 던지는 진지한 물음이다.
남한 총선거가 확정되자, 러시아는 곧바로 선거 방해에 나섰다. 그리고 두 가지 공작을 추진했다. 먼저 시작된 공작은 남로당과 그 외곽 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동원한 전국적 폭동이었다.
2월 7일 시작된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교통이 마비되고 통신이 끊기고 공장들이 멈췄다. 곳곳에서 경찰서들이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고, 많은 경관들이 살해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공연히 투표 방해에 나서서, “미제가 꼭두각시 유엔을 통해서 획책하는 제국주의 선거”에 참여하는 매국노들을 처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2.7구국투쟁’이라 부른 이 폭동은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정상적 선거 활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그동안 폭동을 일으켜서 체포된 공산주의자 669명을 미군정청이 석방한 조치였다. 한국임시위원단은 도착하자마자 정치범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한민당 대표 김성수는 ‘남한에 정치범은 없고 폭도들만 수감되었다’고 설명했지만, 위원단은 수감된 공산주의자들을 풀어주라고 거듭 요구했다. 그런 압력에 굴복해서, 하지 사령관은 그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자연히, 남로당의 조직이 완전히 복구되었고, 기세가 오른 남로당 지도부는 폭동을 통한 선거 방해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선거 방해가 가장 심각했던 지역은 제주도였다. 4월 3일 남로당 간부 김달삼의 지휘 아래 제주도 좌익이 봉기해서 경찰관들과 ‘반동분자’들을 습격하고 살해했다. 이 지역의 좌익은 우익에 대한 반감이 유난히 커서, 경찰관을 ‘개’라 부르고 경찰관들과 우익 인사들의 가족들까지 해치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같은 남로당이 일으킨 전국적 규모의 폭동들인 ‘대구폭동’이나 ‘2.7구국투쟁’보다 제주도만의 ‘4.3사건’이 오히려 피해가 훨씬 컸다.
이런 사정에다 반군이 한라산에서 유격전을 폈다는 사정이 겹쳐서, 미 군정청과 대한민국 정부의 무자비한 대응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참화를 입었고,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또 하나의 공작은 ‘남북협상’이었다. 남한 총선거를 거부한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에 초청해서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였다. 이 공작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공동 성명서가 나왔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와 남한 ‘좌우합작’의 우익 지도자 김규식이 가담한 터라, 남한 총선거 비난 성명은 유엔 주도의 남한 총선거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승만은 러시아 주도의 선거 방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궁극적 충성심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번 선거의 본질은 자유주의를 따르는 민족주의자들과 전체주의를 따르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대결임을 일깨웠다. 그리고 “민족 진영에서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승리할까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요, 오직 독립주의와 독립반대주의와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기회만 엿보는 중간주의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주의가 성공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서 투표”하라고 구체적 지침을 제시했다.
좌익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킨 터라,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승만을 따르는 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 대한노총, 서북청년회 같은 청년단체들이 치안 유지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좌익의 선거 방해에 맞섰다.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전국 각지에서 봉화 시위, 관공서 습격, 입후보자와 선거 관계자들에 대한 테러, 교량과 철도 파괴, 전화선 끊기와 전신주 뽑기를 통한 통신 방해, 각종 시설들에 대한 방화와 같은 폭력 사건들이 일어났다. 인명 피해도 엄청났다. 선거공무원은 15명이 죽고 61명이 부상했다. 입후보자는 2명이 죽고 4명이 부상했다. 경관은 49명이 죽고 128명이 부상했다. 경관 가족은 7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했다. 우익 인사는 11명이 죽고 47명이 부상했다. 일반인은 107명이 죽고 387명이 부상했다. 폭도는 261명이 죽고 123명이 부상했다.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선거구들에서 투표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투표자들은 아침부터 긴 줄을 서서 기다렸고 흡족한 마음으로 ‘투표’라는 낯선 일을 치렀다. 덕분에, 끝내 투표를 진행시키지 못해서 선거가 연기된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를 빼놓은 198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들이 나왔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가까스로 태어나려는 대한민국이 ‘피의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기적이란 말은 너무 헤프게 쓰이지만, 이번만은 적절한 표현이다. 그런 기적은 유권자 813만2517명의 96.4%인 784만871명이 등록했고 등록 유권자의 95.5%인 748만7649명이 투표했다는 사실이 증언한다.
‘5.10 총선거’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아 본 적이 없는 한국인들에겐 새로운 경험이었고 한국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점을 잘 보여준 것은 투표장의 풍경들이었다. 여성들이 투표장에 나온 것 자체가 혁명적이었다. 비밀 투표가 처음인지라, 아내가 남편을 따라 기표소에 들어가려는 일이 흔했고, 선거관리 요원들이 부부를 떼어놓느라 애를 먹었다. 기표소에서 나오면, 사람들은 흔히 선거관리 요원에게 투표지를 내밀었고 투표지를 접어서 투표함에 넣으라는 안내를 받아야 했다.
한국임시위원단은 남한의 선거가 “발언, 언론 및 집회의 자유라는 민주적 권리들이 발휘된 합당한 정도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으며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었고 한국인들의 대략 3분의 2를 이루는 주민들이 사는 한국의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자유 의지의 유효한 표현을 이루었다”고 발표했다.
하지 사령관은 이번 선거가 “만일 전 조선 역사상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근대 조선사상에 가장 중대한 진전”이라 평했다. 이승만도 흡족한 마음으로 “금번 총선거에 90퍼센트 이상의 호성적(好成績)을 얻은 것은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다시 한번 표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승만의 평가대로 “호성적을 얻은” 남한 총선거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세력은 남북협상파였다.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 선언했으니, 이제 국회를 중심으로 펼쳐질 남한 정치에선 설 땅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남로당의 선거 방해가 워낙 극렬했고 피해가 커서, 남북협상에 대한 기대나 지지도 크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 없었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선물”을 달라고 요청하면서 감옥에 갇힌 조만식을 석방해서 자신과 함께 남한으로 가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이런 부탁마저 야멸차게 거부했다. 남북협상파의 쓸모는 이미 다한 것이었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이 이끈 남한 대표단은 남한의 총선거를 비난한 것 말고는 이룬 것 없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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