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인생의 레시피는 다 달라요
꽃샘추위가 한창인 어느 초봄, 20대 초반 손녀가 짐을 싸들고 할머니 집으로 덥석 내려온다. 할머니의 요리를 배우겠다며 손녀가 할머니 집을 급습(?)한 상황. 그의 요리를 오래도록 동경해온 마음과 손맛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손녀는 세상을 향해 당돌하게 선포한다. “할머니의 사계절 요리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좌충우돌, 세상 유일무이한 요리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건 세상 하나뿐인 학교, 그러니까 나와 우리 할머니가 그려낸 인생 학교 이야기다.
남들과 같은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와 확신이 나를 대학 대신 이곳으로 이끌었다. 나는 ‘학교에선 배울 수 없는 법’들을 이곳에서 배우고 있다. 가령 무례한 사람에게도 웃으면서 인사하는 법, 봄의 산책길을 오롯이 느끼는 법, 나와 띠동갑에 띠동갑인 이웃들과 가족처럼 지내는 법 등등. 법전이나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생살이에 꼭 필요한 법칙을 나는 ‘할머니 학교’에서 익혔다. 내가 살아온 날보다 몇 배나 오래된 할머니의 지혜가 담긴 이 ‘법’들은 마치 오래 묵어 잘 숙성된 장처럼 세월의 깊이가 묻어 더욱 웅숭깊다.
요리도 그렇다. 예전의 나는 대단한 재료와 장비들이 있어야 훌륭한 요리가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할머니 학교에서 나는 묵은 소금, 집간장, 매실 엑기스만으로도 깊은 맛을 낼 수 있단 사실을 배웠다. 묵은지와 발효액처럼 오래 묵어야 더 맛이 나는 것들을 통해, 뭐든 빨리 끝내기 바빴던 지난날의 나를 여유로운 호흡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처음 예상한 1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할머니 요리 학교에 다니고 있다. 언젠간 졸업할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이 순간이 참 좋다. 서로의 밥이 세상 가장 중요한 일인 양 챙기는 일, 두 사람의 나이를 합쳐 100년 묵은 지혜를 나누는 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레시피를 만드는 일 말이다. 나처럼 조금 다른 길을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남들과 같은 레시피가 아니어도, 조금 뒤에서 걸어도, 대학에 가지 않아도, 도시에 안 살아도 괜찮다는 걸. 나는 이를 오늘도 할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요리학교를 통해 한 땀 한 땀 배워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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