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동화’ 듣고 자란 아이, 푸틴 고발하는 인권 변호사로
우크라이나 인권 단체 ‘시민 자유 센터(Center for Civil Liberties·CCL)’를 이끌고 있는 변호사 올렉산드라 마트비추크(40)에게 조국이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지난해 2월 24일 새벽은 ‘기이하도록 조용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사방이 고요하던 새벽 5시 다급하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휴대전화를 보니 안부를 묻는 지인들의 부재중 전화가 수십통 걸려와 있었다. 귀를 찢는 포성도, 비명도 없이, 전쟁은 조용히 시작됐다. 그러나 가혹한 살상이 시작된 전선, 도시 한복판에 쏟아지는 미사일과 드론, 생이별과 피란길 등 지옥도가 펼쳐지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왔던 CCL 구성원들은 국제사회에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 노력을 인정받아 CCL은 202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세계지식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마트비추크는 12일 본지와 만나 “소련 제국의 부활을 꾀하는 푸틴을 국제사회가 협력해 막아내지 못하면, 우크라이나처럼 침공받는 나라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마트비추크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함께 국제사회에 불굴의 저항 의지를 알린 인물로 꼽힌다. 젤렌스키가 공식 외교 무대에서 정상 외교전을 수행하는 동안, 마트비추크는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앞세워 시민사회와 연대해 전쟁의 불법성을 알려왔다. 그는 CCL을 대표해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러 노르웨이 오슬로로 향하면서 “형언하기 어려운 무거운 책임감이 마음을 짓눌렀다”고 회상했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은 러시아 인권 단체 ‘메모리알’과 벨라루스 인권 운동가 알레스 비알리아츠키도 공동 수상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왜 적성국과 함께 받느냐”는 비난도 있었다. 그는 “그런 비판 여론을 이해한다”면서도 “이 고귀한 상은 국가가 아닌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공동 수상자들은 인류의 품위를 지키고 소련의 부활을 막으려 협력하는 존경스러운 인권 운동가들”이라고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관계에 대해서도 “우리의 활동은 시민사회 영역인 만큼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마트비추크는 법률가라는 전문성을 활용해 러시아가 자행한 인명 살상·고문·성폭행 등 각종 사례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증거 수집 활동도 주도하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 아동 불법 납치 등의 혐의로 푸틴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사법 활동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크라이나 국민 중 80%가 이번 러시아 침공으로 가족이나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며 휴대전화에 저장해둔 한 피해자의 증언을 읽었다. 러시아의 공습으로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여성이었다. ‘가족들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부모는 목숨을 잃었고, 엄마를 부르며 절규하던 아이들의 목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는 내용이다.
그가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배경에는 일찍이 경험했던 소련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있다. 어린 시절 라디오방송 내용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소련 공산당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얼마나 위대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성품의 소유자인지 칭송하는 내용이었다”면서, “레닌 동화였다”고 했다. 마트비추크는 의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지만, 언제나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소련의 현실이었다.
그가 청소년 시절을 보낼 때 소련이 붕괴되고, 주권을 되찾은 조국 우크라이나는 여러 정파로 분열돼 혼란이 이어졌다. 그때 친소련 세력과 맞선 민주화운동가이자 작가·철학자인 예브게니 스베르스추크(1927~2014)의 활동을 지켜봤고, 정의를 실현하는 꿈을 안고 법대에 진학하는 계기가 됐다.
그가 설립한 CCL은 2013년 친러시아 성향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에 맞선 친서방·민주 세력의 항쟁인 ‘유로 마이단’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듬해 크림반도를 무력 병합했고, 동부 돈바스 지역의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결국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미사일을 발사하며 전면 침공까지 단행했다.
‘영토를 일부 양보하더라도 평화를 정착시키자는 주장이 있다’는 질문에 그의 표정과 말투는 단호해졌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인지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인들이 공감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북한의 침략으로 한국이 영토 일부를 빼앗기고 한국인들이 가족과 떨어져 공산 독재정권 압제에서 신음하게 됐는데, 확전을 막자며 포기했다면 그게 평화인가요? 그것은 굴복이고, 침탈은 이어질 것입니다.”
그는 “전쟁의 참화와 이산가족의 아픔을 딛고 민주주의 국가가 된 한국의 존재는 우크라이나인에게 큰 희망을 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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