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푸틴, 조부는 러 제국 몰락시킨 라스푸틴의 셰프였다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노석조입니다. 우물 밖(外)의 책·세상 이야기(說), ‘외설(外說)’을 나누고자 합니다. 종종 기사 밖으로 나와 독자님과 직접 만날 계획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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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의 비선 실세 라스푸틴과의 만남
영국의 시니어 저널리스트인 필립 쇼트(Philip Short·78)가 미국에서 출간한 최신작 ‘푸틴 : 그의 삶과 시대(Putin: His Life and Times)’를 읽었습니다. BBC·이코노미스트 출신인 그가 지난 8년간 블라디미르 푸틴(71·1952~) 러시아 대통령의 삶을 추적한 결과물입니다. 아직 한국어 번역본은 없습니다. (뉴스레터 ’노석조의 외설’은 주로 미번역 외서를 다루고자 합니다.)
푸틴과 북한 김정은이 2019년 4월 이후 4년 4개월 만에 러·북 정상회담을 하는 등 국제 정세가 발 빠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밀착 행보는 우리 안보와 직결됩니다. 관련된 분석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정작 푸틴이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외설’ 이번 편은 푸틴이란 인물에 초점을 맞춘 책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책을 읽다 뜻밖의 수확이 있었습니다. 푸틴의 할아버지가 19세기 러시아 정교회에서 ‘괴승’으로 불린 그리고리 라스푸틴(1869~1916)의 요리사였다는 사실입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팩트입니다.
라스푸틴은 러시아 제국의 몰락을 앞당긴 ‘간신’ ‘괴승’으로 불리는 인물. 떠돌이 수도승이었던 그는 차르(Tsar·황제) 니콜라이 2세의 하나밖에 없던 아들의 병을 이상한 주술로 낫게 해 차르의 환심을 얻어 권력을 쥐었습니다. 이걸로 그는 국정을 주무르고 정실 인사를 남발하며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잔인하게 처형당했고요.
푸틴의 할아버지 스피리돈 이바노비치 푸틴(1879~1965)은 이런 라스푸틴이 한참 잘 나갈 때 그의 사랑을 받는 요리사였다고 합니다. 스피리돈은 최하층 노동자 신분인 아버지를 따라 열다섯이던 189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주해 요리를 배웠다고 합니다. 실력이 좋아 당시 권력자들이 드나들던 아스토리아 호텔의 요리사가 됐고 그 덕에 라스푸틴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스피리돈은 호텔에 라스푸틴이 오면 특식을 내놓았습니다. 라스푸틴은 팁으로 금화를 줬다고 합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자신과 이름이 엇비슷한 점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여튼 라스푸틴이 얼마나 많은 재력을 갖고 돈을 흥청망청 썼는지, 스피리돈이 그의 마음에 얼마나 쏙 들었는지를 짐작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라스푸틴은 사이비 수도승인 게 들통나 1916년 처형을 당했고, 이듬해 혁명이 일어나 제국이 아예 무너져버렸습니다. 이 정변으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스피리돈이 일하는 호텔은 문을 닫았고, 호텔방들은 공산당 간부들의 차지가 됐습니다. 은행도 갑자기 폐업을 하면서 금고의 모든 돈이 공산당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스피리돈은 라스푸틴으로부터 받은 금화며 예금한 거의 모든 재산을 통째로 잃었습니다.
◇레닌·스탈린의 식탁도 담당…권력가의 셰프
스피리돈은 고향인 티베르로 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는데, 여기서 그는 또 다른 권력가를 만납니다. 바로 그의 옛 고객 라스푸틴이 기생한 차르 제국을 뒤엎은 볼셰비키의 우두머리이자 소련 공산당을 창당한 레닌(1870~1924)입니다. 이 부분은 책 말고 2018년 푸틴에 대해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히 나옵니다.
푸틴은 이 다큐에서 직접 말합니다. “할아버지 스피리돈은 모스크바 근교 ‘다샤(러시아식 시골주택)’에 살면서 처음에는 레닌을 위해, 그다음에는 스탈린을 위해 계속 크렘린궁의 요리사로 일했습니다.”
1924년 레닌 사망 후에는 과부가 된 레닌의 아내와 그녀의 자매를 위해서도 요리를 해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레닌 체제의 서열 2위이자 실권자였던 스탈린(1922~1952)도 챙겼습니다. 소련의 최고 권력 서열 1·2위를 동시에, 1위가 사망한 이후에는 1위의 유족과 더불어 2위에게도 요리를 했고, 그런 지위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일각에선 스피리돈이 소련 정보기관인 KGB(국가보안위·1954~1991)의 전신인 NKVD(내무인민위·1934~1946) 소속원과 같은 지위를 누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최고통수권자의 음식을 다루는 것 자체가 안보 및 보안 사항이었으니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훗날 스피리돈의 손자 푸틴은 이 기관의 후신인 KGB 요원이 됐고 그 권력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장기 집권 독재자가 돼 제2의 스탈린이 되려고 하게 되리라고는 당시엔 그 누구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스피리돈도 그걸 바랄 꿈도 꾸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푸틴이 이런 집안 내력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린 것은 레닌·스탈린과의 관련성을 선전하며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자신의 야욕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흥미롭게도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푸틴은 자기 할아버지가 라스푸틴의 금화 동전 팁을 받던 요리사였다는 사연은 쏙 뺐습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게 있습니다. 푸틴의 할아버지가 차르 시대부터 소련 탄생까지 이어지는 권력자들의 셰프였는데, 푸틴에게도 사랑스럽고 권력지향적인 셰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 반란을 일으키고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예브게니 프리고진입니다. 그는 한국에는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을 이끌며 ‘푸틴의 칼잡이’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는 사실 푸틴 할아버지가 요리를 배운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요리사로 유명합니다.
그는 1990년 소련이 붕괴할 무렵 러시아 각지에 고급 레스토랑을 열었고,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료이던 푸틴을 손님으로 만나 친해졌습니다. 프리고진은 이 인연을 계기로 크렘린궁에서 열리는 각종 만찬과 연회를 도맡으면서 ‘푸틴의 요리사’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푸틴의 오더를 받았는지 2014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을 창설해 칼잡이 역할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런걸 보면 사실 어느 나라나 비슷하겠지만 음식이란 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강력한 매개체인 듯합니다. 특히 요리사는 독재자에게는 진짜 믿는 사람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로열티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독재자는 자연스럽게 더 중한 임무를 이런 부하들에게 맡기게 되고 그만큼의 권력과 부(富)를 나눠주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해군 잠수함병·정보기관 특수부대원의 아들
푸틴 아버지의 풀 네임은 블라디미르 스피리도노비치 푸틴(1911~1999)입니다. 그는 공장 노동자인 마리아 이바노브나 푸티나(결혼 전 성씨는 셸로모바)와 1928년 결혼했습니다. 그는 1930년대 초 소련 해군으로 징집됐는데, 잠수함 승조원으로 근무했다고 합니다. 1941년 나치 독일과 소련이 전쟁을 벌일 때는 KGB의 전신인 정보조직 NKVD의 폭파 전문 특수부대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전쟁의 시기에 태어나 젊은 시절을 군인으로서 전쟁터에서 보낸 것입니다. 1942년에는 크게 다쳐 상이군인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푸틴은 어릴 적부터 참전군인인 아버지로부터 나치 독일과 싸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푸틴의 아버지의 어머니, 즉 푸틴 할머니는 1941년 고향인 티베르 지역에서 나치 독일군에 살해됐으며, 푸틴의 삼촌도 2차 세계 대전 기간 독일과 소련의 전쟁터에서 실종된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 당시 많은 소련 아이들이 전쟁을 겪으며 지냈듯이 푸틴도 그러했고, 그런 유년 시절 환경은 그를 호전적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분석되기도 합니다. 푸틴은 12살에 러시아 무술인 삼보를 배웠고, 유도도 검은 띠까지 따 전국 주니어 유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푸틴은 이런 자신의 무술 경력을 종종 정치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정보와 권력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
푸틴은 10대 시절부터 KGB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16살 때는 KGB 본부가 자리한 레닌그라드 리티니 거리 4번지에 가서 보이는 관계자 한 명을 붙잡고 어떻게 하면 KGB 요원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 관계자가 군대에 가거나 학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그는 무슨 과를 가는 게 유리하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중에 법대에 들어간 것도 이때 들은 추천학과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법대를 졸업하고 KGB에 들어갔습니다. 상이군인과 공장 노동자의 자식인 그는 출세할 방법으로 KGB를 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서른셋인 1985년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KGB 지부로 파견 갔습니다. 독일과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당시는 독일이 통일되기 전인데, 그가 근무하는 기긴 동독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1989년 12월 동독 정권의 공권력이 유명무실해질 정도로 약해지고 폭도들이 KGB 건물을 둘러싸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면서 반대 세력은 조금도 용납해서는 안 되고 철저히 통제해 강한 중앙 집권적 통치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많이 알려졌듯이 훗날 푸틴은 KGB에 있다가 1990년 소련이 붕괴하자 정계에 진출해 그의 할아버지가 요리를 배웠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시장을 하고 보리스 옐친 정권에서 총리직을 했습니다. 옐친이 건강 문제로 물러난 이후에는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하다 2000년 선거로 집권해 지금까지 23년 넘게 권좌에 앉아있습니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닌 두 독재자
그의 나이 올해로 일흔하나입니다.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긴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나 부은 얼굴 등을 근거로 건강 이상설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2년째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대국 중의 대국인 러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재래식 무기는 구형밖에 없는 북한에 탄약을 달라며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정은은 2011년 집권한 이후 12년이 되도록 식량 부족 등 경제난만 악화했을 뿐 아무런 성과가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입니다. 일흔이 넘은 독재자와 마흔도 안 된 독재자가 겉으로는 웃으며 전 세계를 향해 우리가 손을 잡는 모습을 보라며 브로맨스를 과시하려고는 있지만, 그 이면에는 벼랑 끝에 섰을 때의 불안함이 똬리를 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미 정보 당국에 따르면 북한에선 평양을 제외하고는 곳곳에서 먹지 못해 쓰러지는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정은은 이번 푸틴과 회담에서 옥수수 가루라도 듬뿍 얹어와야 하는 처지입니다. 한국과 미국을 위협하려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군사정찰위성, 핵 추진 잠수함 개발 기술을 얻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의 장기전으로 자국 경제난과 민심 동요에 진땀을 흘리는 푸틴이 북한이 원하는 만큼 넉넉한 식량을 나눠줄 수 있을지, 우크라이나의 만만찮은 반격에 예비군 동원령까지 발령한 러시아가 핵심 군사 기술을 북한에 전수해줄 여유가 과연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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