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정의·자유…불가능한 것 추구하는 과정서 가능한 것 실현돼”[김대중·만델라·브란트에게서 통합의 길을 찾다]

박은경 기자 2023. 9. 12.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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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교수, 만델라·브란트 재단 대표 대담
베른 해리스 넬슨 만델라 재단 대표,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 볼프람 호펜슈테트 빌리 브란트 재단 소장(왼쪽부터)이 지난 11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경향신문과 대담을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zenism@kyunghyang.com

미·중 간 전략경쟁 심화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체제로의 양분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평화는 더 멀어지고 복잡하게 꼬인 갈등의 실타래는 쉽게 풀리기 어려워 보인다. 정치인들은 화해와 통합을 모색하기는커녕 진영 간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 지금보다 더 혼란했던 시기에 통합을 이뤄낸 지도자들은 어떤 조언을 들려줄까.

경향신문은 지난 11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와 볼프람 호펜슈테트 빌리 브란트 재단 소장, 베른 해리스 넬슨 만델라 재단 대표의 대담을 통해 포퓰리즘으로 증폭된 이념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어떻게 나침반을 세워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구했다. 이들은 20세기 세계적 지도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삶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참여, 신념, 영감, 용기 같은 단어들을 강조했다.

브란트 전 총리는 1969년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기치 아래 동방정책을 추진했고 이후 20년 동안 동서독 간 지속적인 교류·협력 과정을 거쳐 통일을 이뤘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와 투쟁한 인권운동가로 1994년 남아공 사상 첫 흑인 대통령에 당선됐다. 평생에 걸쳐 민주화 투쟁을 하고 남북 화해정책을 펼친 김 전 대통령의 삶과 닮아 있다. 이하 대담 전문.

박명림 교수가 본 김대중

자신을 억압한 사람들까지 용서해
현실 정치서 실질적 리더십 발휘
정의·인권 포기 않음으로써 영향
커지는 이념 갈등·포퓰리즘 속
용서 넘어선 관용·포용 배워야

박명림 교수(이하 박명림) = 김 전 대통령은 <만델라 자서전-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번역했고,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부의 정치적 탄압을 받아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등 브란트 전 총리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죠. 김 전 대통령과 만델라 전 대통령, 브란트 전 총리의 삶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고 깊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삶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에도 교훈을 주는데 통합과 평화가 정수라고 봅니다. 국민통합을 위한 연정을 이뤄냈고, 이를 바탕으로 대외적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죠. 이런 것들이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때 자발적 금모으기 운동이나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한·일 협력을 보여준 2002년 한·일 월드컵 성사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호펜슈테트 소장(이하 호펜슈테트) = 브란트는 평화와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개인의 번영뿐 아니라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스스로 개발해나갈 수 있는 자유를 뜻하죠. 필요한 것을 제공받을 수 있는 공평한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중에서도 교육의 기회를 강조했습니다.

해리스 대표가 본 만델라

희망만으론 부족…신념이 중요
올바름 쟁취하려는 투쟁 있어야
미래 바꾼다는 신념이 결과 바꿔
만델라라면 우크라이나 사태에
러시아 협상 나서게 노력했을 것

해리스 대표(이하 해리스) = 많은 젊은이들이 만델라는 현실과 괴리된 사람이라고 하는데 저는 여전히 만델라가 많은 영감을 준다고 믿습니다. 청년들은 투표해도 아무 변화가 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투표 자체를 포기해버리죠. 만델라는 자유를 위한 투쟁도 했지만 더 큰 의미를 위한 투쟁으로 확장했습니다. 제가 만델라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희망만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고, 뭔가를 이뤄낼 수 있다는 신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올바름을 쟁취하는 투쟁이 중요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거죠. 만델라는 27년이나 감옥에 있었고 출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계속 준비했고 결국 결과를 바꿨습니다.

박명림 = 이분들의 정신도 중요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실질적 리더십을 발휘한 점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김대중은 개인적 용서나 화해에 있어서 자신을 극도로 억압한 사람들까지 전부 포용하고 용서함으로써 사람들한테 상당한 리더십과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용서를 넘어서 관용이 있었죠. 자신을 압박한 이들을 처벌하고 보복할 줄 알았는데 보수든 이전 정부든 같이 함께 갔습니다. 수감 생활, 망명, 사형 선고 같은 엄청난 개인적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사회적 정의나 인권,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이 리더십과 영향력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호펜슈테트 소장이 본 브란트

실질적 화해 없인 평화 없다 생각
총리 신분으로 무릎 꿇으면서
과거에 대한 인정과 용서 구해
‘한반도 긴장’에 브란트였다면
원칙 지키며 대화 시도했을 것

호펜슈테트 = 브란트도 특별한 케이스였어요. 일단 나치 출신이 아닌 주요 독일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뉴욕타임스에서 ‘다른 종류의 독일인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했을 정도죠. 전후 독일은 영토의 3분의 1을 폴란드에 줄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어요. 당시 평화조약을 선언하지 않고 있었지만 브란트가 패전국으로서 평화조약에 서명해 현실을 직시하도록 했습니다. 브란트는 현상을 변경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정확한 현실 인식이 출발점이 됐죠. 이전까지는 정치에서 동독과 서독을 분리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브란트가 처음으로 하나의 영토 속 두 개의 국가를 말했고, 동서독은 외교적 관계가 아닌 특별한 관계라고 정의하면서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냈습니다.

해리스 = 만델라는 사실 목적성과 행운이 결합된 사람입니다. 목적성에 대해 만델라는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인간이 가야 할 여정이 있고 이에 책임을 져야 하고 여러 집단과의 연결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은 글로벌 연대를 통해 성공한 유일한 운동이죠. 세계 연대의 상징이 됐고, 만델라는 이 덕을 많이 봤습니다.

호펜슈테트 = 저도 첨언하면 브란트는 청년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좋은 롤모델이에요. 개인 환경으로 보면, 아버지를 만난 적도 없고 싱글맘 밑에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장학금으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잘사는 집 아이들과 경쟁하는, 투쟁의 과정이었죠. 1920년대 나치가 부상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현혹됐지만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레지스탕스(저항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브란트도 굉장히 운이 좋았어요. 노르웨이로 망명했을 때 브란트는 경찰에 체포될 뻔한 위험도 있었고, 법적 보호장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난민 생활을 이겨냈죠. 지금 청년들에게 50년 전에 브란트라는 총리가 있었다라고 하면 잘 모르겠지만, 이런 스토리를 들려주면 청년에게도 큰 자극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박명림 = 사실 세 분은 나치즘(브란트), 군사독재(김대중), 아파르트헤이트(만델라)라는 오랜 억압과 위험을 견뎌냈잖아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제가 (김대중 전 대통령) 생전에 여러 차례 여쭤봤거든요. 나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국민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억압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경천애인(敬天愛人·하늘을 외경시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라) 정신이셨던 것이죠. 또 역사 소명 의식이 민주화와 한·일 화해·협력을 이루고 사형 선고까지도 견뎌내게 한 것 같습니다.

해리스 = 만델라는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어요. 하나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강했다는 점이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청년의 특권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 도전해내는 용기가 있었죠.

호펜슈테트 = 브란트는 과거와의 화해의 시작을 알렸고 실질적 화해 없이는 평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1960년대생인데 당시 독일에선 나치 용어 자체가 금기시되는 환경이었어요. 그런데 브란트는 과거를 직시하고 화해의 첫걸음을 내디뎠죠.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화해를 시도했고 총리 신분으로 무릎을 꿇으면서 과거에 대한 인정과 용서를 구했습니다. 매우 긴 프로세스가 필요한데 그걸 성공해낸 사람이죠.

박명림 = 세 지도자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적대감이나 복수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대연정, 연립정부, 진실과 화해 같은 놀라운 정신적 도약을 이루신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펜슈테트 = 브란트는 어떤 적시가 있었던 거 같아요. 1969년 총리가 됐는데, 1960년대 초반부터 시위·집회 움직임이 시작돼 68혁명까지 이어졌고, 전쟁을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하는 부모세대에 청년들이 지쳐 있었죠. 사민당이라는 좋은 연정 파트너를 만났고, 우에서 좌로 바뀌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동방정책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적절한 사회적 타이밍도 필요합니다.

해리스 = 철학적인 답을 드리면, 저는 개인적으로 용서는 가능하지 않고 정의도 불가능하며 자유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박명림 = 김 전 대통령은 저에게 직접 ‘내면이 강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해주셨어요. 독재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약한 모습의 발로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지금은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사태뿐 아니라 한반도 긴장도 높아지고 있는데 현실에 대해 만델라·브란트가 어떤 조언을 해주셨을지 궁금하네요.

호펜슈테트 = 브란트는 평화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였어요. 동방정책이 가능했던 것은 서독의 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주춧돌이 됐기 때문입니다. 브란트였다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해치지 않는 원칙 아래 대화와 협상을 시도했을 겁니다. 그는 한국을 보호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대화에도 개방된 자세를 보였을 거예요.

해리스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비난할 수 있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토와 서방국가들의 도발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만델라는 협상을 바라보며 움직였을 겁니다. 잘되지는 않겠지만,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고 노력했을 거예요. 러시아의 불안이나 두려움을 이해하고 움직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 나라(남아공)도 이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었기에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았고, 전달도 되지 않았죠. 만델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기 때문에 좀 달랐을 수 있습니다.

박명림 = 한국은 보수정부가 들어선 후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이념적 갈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해리스 = 현재 민주주의 위기는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정말 특이하고 단일한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펜슈테트 = 브란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세계 협력체제에 대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협력체제가 모든 걸 해결할 순 없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세계 협력체제가 필요한 이유죠.

해리스 =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도 세계 협력체제는 이뤄지지 못했고, 냉전 시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심지어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었음에도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너무 위험한 상황이니 세계적 단합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박명림 = 현재 세계적으로 이념 갈등, 인종주의가 심각하고 각 국가 지도자들이 포퓰리즘까지 심하게 동원하고 있다는 점은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백인까지 껴안았던 흑인 대통령 만델라, 동독을 인정했던 서독의 브란트, 탄압자들까지 포용한 민주화 투사 김대중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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