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당하고, 죽임당하는데도…전쟁은 사람을 ‘숫자’로 만들어”
9년째 러시아 자행 범죄 조사
지난해 2월 이후에만 ‘5만건’
“러, 아이에게도 총 쏘는 건
한 번도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
“전쟁은 사람들을 ‘숫자’로 바꿔버렸습니다. 이제 희생자들은 이름이 아니라 그저 숫자로 불립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기엔,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인권변호사 올렉산드라 마트비추크(39)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9년째 우크라이나에서 자행된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조사하고 있다. 지난해 2월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면전’이 벌어졌지만,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전쟁은 2014년 러시아가 돈바스와 크름반도를 점령했을 때부터 시작됐다고 그는 말한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된 각종 전쟁범죄를 조사하고 세상에 알린 9년여간의 노력으로, 그가 이끌고 있는 인권단체 우크라이나 시민자유센터(CCL)는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국 각지를 돌며 범죄 피해자들을 만나고 있는 그가 매일경제가 주최하는 세계지식포럼 참석차 한국을 찾았다. 12일 특별강연에 앞서 경향신문과 만난 마트비추크는 “지난해 2월 이후 우리는 5만건이 넘는 전쟁범죄 피해 사례를 조사했다”면서 “이는 엄청난 양이지만, 여전히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알렉산드로 실리포프라는 이름의 62세 남성이 자신의 집 근처에서 러시아군에 살해됐습니다. 그는 비무장 상태였고, 평범한 농부였어요. 우리는 희생자를 그저 ‘숫자’로 부르지만, 그의 아내는 법정에서 남편이 자신의 ‘우주’였고,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수많은 사건 중 재판에 넘겨진 첫 번째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우리가 파악조차 하지 못한 비극이 또 얼마나 있을까요.”
그는 “지난 1년6개월간 러시아 점령지역에서 포로로 붙잡혔다가 살아남은 수백명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강간을 당했는지, 나무 상자에 갇혀 손톱이 뽑히고 전기고문을 당했는지 이야기했다”면서 “전면전이 시작된 후 우리는 전례 없는 규모의 전쟁범죄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마트비추크는 러시아가 민간인을 상대로 한 범죄를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쟁범죄가 몇몇 러시아군에 의해 자행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된 체계적인 범죄”라면서 “그들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고의적으로 강간, 고문, 학살 등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고 말했다.
“그저 평범한 러시아 군인들이 작은 마을 부차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발포하고, 아홉 살짜리 딸 앞에서 어머니를 강간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 14세 아이를 총으로 쏠 이유도 없죠.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 번도 처벌받지 않았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트비추크는 “이런 범죄는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과거 체첸, 몰도바, 조지아, 말리, 시리아 등 다른 국가에서도 자행됐다”며 “그러나 러시아는 단 한 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책임 묻는 국제적 시스템 공백
“특별재판소 설립 필요한 이유”
그는 러시아의 전쟁범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제적인 시스템의 공백이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다른 전범들을 기소할 수 있는 국제법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국제형사재판소(ICC)조차도 러시아의 침략범죄에 대한 관할권이 없다. 이것이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조사하고 처벌할 ‘특별재판소’의 설립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으로 나치 전범들은 처벌받았지만, 그건 나치 정권 몰락 이후의 일이었다”며 “지금 시대는 과거와 달라야 한다. 푸틴 정권의 힘과 무관하게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 제재 동참 않는 국제사회
중립 아닌 점령에 방관하는 것”
마트비추크는 지난 9일 주요 20개국(G20)이 발표한 공동선언문에서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문구가 빠지는 등 국제사회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지 못하는 것에도 우려를 표했다.
그는 “일부 국가들은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곧 ‘중립’이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심각한 국제질서 파괴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있을 수 없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중립’을 지킨다며 방관하는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것을 돕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멈추지 못한다면 국제사회에 더 큰 위협이 초래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이 전쟁을 단순히 ‘우크라이나인만의 전쟁’이라고 보지 않는 이유다. 그는 “푸틴은 언제나 옛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를 아쉬워했고 과거의 영광을 복원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말해왔다”면서 “지금 러시아는 제국이 되고자 하며, 제국은 힘이 있으면 늘 확장한다. 푸틴을 우크라이나에서 멈춰 세우지 못한다면 그는 우크라이나에 이어 또 다른 나라로 더 진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트비추크는 우크라이나가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서라도 러시아와 협상에 나서 전쟁을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조국이 점령당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생이별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며 “국민의 생명은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죽음의 위협 속에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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