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 이념의 시대가 오는가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죽음과 함께 탈역사의 도래를 주장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 한국사회에서는 이념 논쟁이 다시 뜨겁다. 게다가 이 논쟁의 화두를 윤석열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제공했기에, 이의 파장 역시 크다.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맹공한 데 이어 얼마 전에는 “기본적으로 분명한 철학과 방향성 없이는 실용도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선 때는 “낡은 이념으로 국민 편 가르지 않고 경제 도약을 이루는 데 모든 역량을 모으겠다”고 하면서 강조했던 실용과 민생의 자리에 이념문제가 둥지를 틀었다. 정치적 맥락을 잠시 접어둔다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그는 가장 철학적인 대통령이라는 생각조차 든다. 흔히 이념보다는 실용을, 이상보다는 현실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정치가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런데 실용을 강조하는 탈역사에서 빠져나와 이념을 중시하는 역사로 역주행하려는, 흔치 않은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동서냉전의 이념투쟁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종국적인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인류는 드디어 역사로부터 탈역사의 시대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계산이나 기술문제의 무한한 해결, 묘한 소비 욕구의 충족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가 인정받기를 위한 노력, 추상적인 목표를 위한 자기희생, 지속적인 용기와 도전, 상상력과 이상주의를 대치하면서 결국 철학이나 예술마저 사라지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고 보았다.
물론 후쿠야마는 이런 단순한 시각을 후에 어느 정도 수정했지만, 탈역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논문에서도 언급된, 파리에서 활동한 러시아 유대계 출신의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1902~1968)의 <헤겔철학 입문>에 등장한 탈역사 개념에 주로 의존했다. 탈역사와 관련된 주장 가운데는 독일의 전후 보수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 아르놀트 겔렌(1904~1976)이 있다. 특히 산업사회의 생활 수준 향상과 연관을 지어 제기한 그의 탈역사에 관한 논의는 오늘의 한국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이상적인 동기들이 점차 사라지는 대신 세상에 나오자마자 곧 낡아 버릴 발명으로 채워질 미래 속으로 흡수되는, 오로지 향상되는 생활 수준에 젖어 있는 탈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가 탈역사 시대에 산다면 미래에 대해서 더는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탈역사 시대에는 많은 이념은 역사박물관에나 보존되는 것이기에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떤 슬픈 감정도 자아낼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겔렌은 우리가 여전히 과거로부터 미래를 위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논거가 있다면 이는 바로 탈역사에 대한 반동(反動)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대량소비사회에서 지속되는 개성의 상실에 저항하는 ‘금욕적 엘리트’의 탄생에 큰 기대를 건다. “우리는 언젠가는 풍요한 삶만을 좇는 일반적인 경쟁에서 스스로 벗어나서 시끄러운 사회적·정치적 갈등의 보편적인 전제에 도전하는 금욕적 엘리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념과 이상이 사라진 탈역사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이런 금욕적 엘리트는 니체가 그렸던 ‘초인(超人)’의 모습에서 하나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초인은 졸아들어 창조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지막 인간’의 정반대 개념이다.
이를 두고 니체는 “대지 위에 만물을 작아지게 만드는 마지막 인간이 뛰어다닌다. 이 종족은 벼룩처럼 없애기 힘들다. 마지막 인간은 가장 오래 사는 종족이다”라고 묘사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이 마지막 인간을 ‘말인(末人)’으로 번역하는데, ‘인간말종(人間末種)’이라는 단어도 있으니 마지막 인간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시켜준다는 느낌도 든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10년 동안 심산에서 수도를 마치고 다시 대지를 밟은 차라투스트라는 처음으로 군중에게 자유스럽고 창조적이며 자기파멸도 두려워하지 않은 초인의 의미를 설파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그런 초인보다는 행복과 안일을 추구하고 법과 복종의 차이에 대해서도 별 관심 없는, 나약한 말인을 택하겠다고 외친다. 이들은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말인을 달라! 우리를 그 말인으로 만들어 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대에게 초인을 선사하겠다!”고 빈정거리며 그를 조롱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평준화된 대량소비사회에서 초인일 수도 있는, 앞서 언급한 금욕적인 엘리트의 등장은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 오히려 과욕으로 살찐, 확대 재생산하는 지배 엘리트 집단이 공략 불가능해 보이는 철옹성을 쌓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진단이 아닌가.
오늘날 지배 엘리트는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정치적 계급’을 형성하고 촘촘히 엮인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념 창출에 골몰한다. 그러나 이 이념은 대개 기술발전과 경제운용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어떤 신비스러운 이념으로도 포장되지 않아 투명해진 이런 상황을 겔렌은 ‘수정화(水晶化)’나 ‘정지된 토대 위의 운동’이라고 묘사했다.
이렇게 이념이 사라지고 기술과 과학만이 마지막 이데올로기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오늘날, 뜬금없이 “제일 중요한 게 이념입니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바로 이념입니다”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다.
그렇다면 그러한 철학과 이념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물론 모두 이야기하는 4차 산업혁명도 그 안에 들어 있다. 후쿠야마가 주장한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도 당연히 그 목록 안에 들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공산전체주의’의 비판이 들어 있다. 대체로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동의어로 이해하지만, 독일의 정치학자 카를 디트리히 브라허(1922~2016)나 미국의 유럽과 중동 현대사의 전문가인 월터 라커(1921~2018)는 이를 너무 도식적이고 ‘정태적(靜態的)’인 시각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흥미 삼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 대화형 챗봇에 공산전체주의라는 단어를 입력해 보았다. 예상대로 공산주의에 대한 답변만 반복한다. 그렇다면 공산전체주의라는 신조어를 특별히 사용해야 할 동기는 어디서 왔는가.
몇년 전에 있었던 새 역사교과서의 집필기준을 둘러싼 시끄러운 논란이 있었다. 보수진영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주의라는 개념만을 사용하는 것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도 민주주의에 포함하려는 의도라고 거세게 항의했다. 이런 정황으로 미뤄 볼 때 전체주의 안에서도 파시즘이나 나치즘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공산주의, 그리고 바로 이 이념 위에 세워진 북한의 존재를 특별히 부각하려는 신조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논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천황제 파시즘의 질곡으로부터 민족해방을 위해 외국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무장투쟁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확신이다. 그는 조국 해방도, 비극적인 민족분단도 못 본 채 카자흐스탄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런데 2023년의 잣대로 그의 삶을 평가절하하려는 시도는 한마디로 오늘의 이념을 위해서 과거를 재단하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1980년대 중반에 서독에서 이른바 ‘역사학자 논쟁’이 있었다. 일련의 보수적 역사학자들은 “나치즘은 볼셰비즘에 대한 일종의 반응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나치즘에 면죄부를 주려 했다. 이러한 시도를 하버마스를 비롯한 학자들은 강하게 비판했고, 언론과 정치도 이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번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논란은 이상하게도 학계 논쟁도 없이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이내 정치적이며 행정적인 차원의 결말로 넘어간다.
사실 코로나19 팬데믹이란 미증유의 재난을 겪고, 유럽의 한복판에서조차 1년 반 넘게 전쟁이 지속하는 과정으로 말미암은 경제위기로 지구촌은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말 그대로 모두가 지쳐 있고 각자도생해야 하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는 민생이 곧 이념일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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