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못 먹는 영화"…'1947 보스톤' 강제규 감독, 위기 속 韓영화가 살길(종합)[인터뷰]
[OSEN=김보라 기자] “힘든 상황에 놓이면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가난한 시절을 살았던 손기정 선수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꿈꾸고 살아야 하는지 얘기하고 싶었다.”
강제규 감독은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에서 열린 OSEN과의 인터뷰에서 “힘든 시기에 있어도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의 열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과 용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1947 보스톤’에 담은 메시지에 대해 이 같이 밝혔다.
강 감독이 연출한 ‘1947 보스톤’(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콘텐츠지오, 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빅픽쳐)은 1947년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마라토너들의 도전과 가슴 벅찬 여정을 그린 이야기. 지난 2019년 9월 크랭크인 해 2020년 1월 촬영을 마쳤지만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인해 3년 넘게 개봉을 미뤄야만 했다. 이에 강 감독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개봉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1996), ‘쉬리’(1999),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강제규 감독은 ‘장수상회’(2015) 이후 8년 만에 컴백하게 되면서 부담감이 컸다고 토로했다.
‘장수상회’ 이후 연출작을 내놓은 것에 대해 “2020년 1월 촬영을 마쳤는데 그해 2월 초 코로나가 시작됐다. 저는 3년 간 코로나가 이어질 줄 몰랐다. 아마 조금이라도 늦어졌으면 촬영도 마무리 짓지 못했을 거다. 불행 중 다행이다. 그 사이에 여러 편의 한국영화들이 개봉을 했지만 하루빨리 예전의 상황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던 중에 OTT 등 새로운 플랫폼이 발달해서 극장 개봉용 영화가 더 어려워졌다. 이제 고착화하면서 관람 패턴이 완전 바뀌었다. 극장의 문턱이 점점 더 높아지면서 더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 같다. 이젠 볼 만한 영화가 나와도 관객들은 극장에 가지 않는 듯하다”고 달라진 관람 형태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강 감독은 “저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은 ‘왜 이렇게 작품을 안 하나?’ ‘옛날에 번 돈으로 아직도 먹고 사나?’라고 생각하시더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웃음) 저도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근황을 털어놨다. 그는 ‘태극기 휘날리며’ 개봉 이후 SF 장르영화를 준비했었지만 한 차례 무산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영화를 내놓을 때 우리나라 영화시장이 어떤 점을 극복해야 하는지 고민했었다. 내가 독립투사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는지 모르겠다.(웃음) 좋은 결과로 이뤄져 감사한데 이후 후배들이 일취월장했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파도치듯 좋을 때가 있으면 어려울 때가 있는 법이다. 현재는 한국영화계가 위기인데 이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대학교 시절부터 마라톤에 관심이 높았다는 강제규 감독은 이날 “투자자들이 ‘폭발 장면이나 카체이싱 없이 그냥 달리는데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드냐?’고 물어보시더라.(웃음)”며 “저는 젊은 친구들이 그 시대를 다룬 영화에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일제강점기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기획 의도 및 연출 방향을 설명했다. 감독은 미술, 의상, 분장 등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1947년 서울과 보스턴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했다.
강 감독은 젊은 나이대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극 중 인물들의 말투도 현대적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인물들의 어투가 어색하지 않은 선에서 현대식으로 바꾸었다. 그 시대적 특징을 상쇄시키더라도, 젊은 관객들에게 이질감 없이 다가가기 위한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강제규 감독은 전작 ‘마이웨이’(2011)에서도 1930~1940년대를 배경으로 손기정이라는 인물을 담았던 바. “달리기는 가난한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소위 말해 ‘흙수저’들의 꿈을 관통하는 소재라고 본다”고 마라톤 영화를 연출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밝혔다.
그러나 강 감독은 “막상 시나리오를 받아 읽어보니 내가 보스톤 마라톤 대회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 선수의 조합은 지어낸 것처럼 극적이다. 실제 사건이지만 잘 짜인 드라마 같은 서사가 있어서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며 “만약에 OTT 드라마 10부작으로 만들었다면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서사를 길게 담아도 됐을 정도로 좋은 얘기”라고 연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털어놨다.
그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저는 마라톤 대회 부분에 집중했다. 실화를 얼마만큼 잘 구현해낼까 싶었다”고 연출에 집중한 부분을 설명했다.
3년 간 편집에 몰두했다는 그는 “6개월 단위로 (관객 선호도 등의) 흐름이 바뀐다는 걸 느낀다. 코로나라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큰 변화가 일었지 않나”라며 “옛날 같았으면 어느 정도 볼 만한 영화가 나오면 극장에 가서 봐주셨을 텐데 이젠 그것마저 무너졌다. 단순히 흥행을 떠나 저희 영화인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면 안 될 상황에 놓였다. 관객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내가 만들지 못할 거 같다는 절박한 마음도 생겼다”고 감독으로서 극장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이 크다고 했다.
하정우, 임시완, 배성우, 김상호 등 배우들이 각각 손기정, 서윤복, 남승룡, 백남용(극 중 백남현)이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했다.
강 감독은 “저는 등장인물들 중 어느 특정 한 사람에게 치우지지 않았다. 보스톤 대회에 임하는 선후배 마라토너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는 과정에서 밸런스를 잘 유지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마라톤의 리얼리티를 살리고 싶었다는 그는 “그래서 임시완에게 요구한 건 체형, 체력 조건, 자세 등이었다. 누가 봐도 임시완이 마치 서윤복 선수처럼 보이게끔 신경을 많이 썼다. 또한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려고 애썼다”고 재차 강조했다.
한국 마라톤의 전설 손기정 선수 역을 맡은 하정우에 대해 강제규 감독은 “하정우와 이번에 처음 작업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며 “무엇보다 하정우가 손기정 선수의 체격을 많이 닮았다”고 캐스팅한 이유를 밝혔다.
손기정 선수는 지난 1936년 열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 일장기를 단 채 ‘손 키테이’라는 일본이름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차지했다.
임시완이 맡은 서윤복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달리기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깡과 악으로 각종 대회를 휩쓰는 불굴의 마라토너. 그는 1947년 열린 제51회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2시간 25분 39초로 전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동양인 선수로서 처음 우승을 차지했던 것.
임시완은 서윤복 캐릭터 소화를 위해 철저한 식단 관리와 운동을 병행해 체지방을 6%대까지 낮췄다. 임시완에 대해서도 강 감독은 “‘미생’, ‘불한당’을 보면서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에너지가 나올 수 있나 싶었다. 언젠가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고 칭찬했다.
그는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보스톤 마라톤 대회신 중 하트 브레이커 구간을 꼽았다. “촬영하면서 난이도가 가장 높은 지역을 택했다. 당시 (멜버른) 날씨는 너무 더웠는데 가파른 언덕길에서 달리는 장면을 반복해서 찍었다. 임시완에게 너무 미안했다. 해외 촬영은 일정이 정말 타이트하게 진행된다. 하루 반나절만 펑크나도 제작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배우들을 너무 돌린 거 같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임시완이 불만 없이 잘달리는 걸 보면서 놀랐다. ‘진짜 서윤복이구나’ 싶었다. 극적으로 중요한 지점의 촬영이어서 그런지 임시완은 힘든 상황에서도 최선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공을 돌렸다.
강제규 감독의 향후 목표는 관객들이 팝콘을 들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결국 먹지 못 하고 나오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러닝타임이 2시간이라면 그 시간 동안 송두리째 영화에 빠져서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숨 쉴 틈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OTT가 보여줄 수 없는 극장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길을 가야 한다. (대박을 터뜨리기보다) 각자의 제작비를 기준으로 그걸 넘는 게 흥행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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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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