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칼럼] 동티를 아십니까
김탁환 | 소설가
섬진강마을영화제를 마쳤다. 첫해와는 달리, 4월부터 매달 마지막 목요일에 공동체 상영과 감독과의 대화를 했고, 영화제 추진위원 92명을 전국에서 따로 모았다. 생태와 마을을 중요하게 여기는 영화제의 흐름을 미리 공유하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마을을 걷고 영화를 보고 또 마을을 걷는 방식은 그대로 유지했다. 올해는 곡성천을 걸으며 청소를 병행했고, 섬진강 들녘에서 낟알이 익어가는 벼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상영작들 역시 마을을 바탕에 두었다. ‘수라’는 전라북도 군산시 옥서면 수라 마을 앞 갯벌이 중심이고, ‘물꽃의 전설’은 제주도 성산읍 삼달리 최고령 해녀와 최연소 해녀의 이야기이며, ‘양림동 소녀’는 광주광역시 양림동의 문화사를 임영희님의 그림과 함께 읊은 작품이다. ‘위대한 작은 농장’은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과 야생동물 그리고 식물들이 어우러져 마을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한다.
섬진강마을영화제는 마을이 직면한 문제들을 마을에서 고민하는 영화제다. 곡성군의 면적은 서울특별시의 10분의 9에 달하지만, 인구는 2만7천명을 넘지 않는다. 혹자는 인구소멸 고위험지역이라고 지적하고, 혹자는 생물종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곳으로 손꼽는다. 지방 농촌 마을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선, 며칠만이라도 그 마을로 와서 걷고 쉬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있다.
동네책방도 마을영화제와 비슷한 결로 바라보아야 한다. 3년 전 곡성에 올 때는 책을 최대한 멀리하려 했다. 역사소설을 쓰려면 거의 매일 사료와 논저를 검토해야 하기에, 곡성에선 소설 집필에 꼭 필요한 책만 읽고 나머지 시간엔 들녘에서 몸을 쓰고자 한 것이다. 품종연구용 논에서 손 모내기를 하고 텃밭에 쌈채소들을 심으며 여름으로 들어갈 무렵, 마을 사람들을 만났을 때 동네책방 이야기가 나왔다. 곡성에 동네책방이 없는 탓에, 초등학생들이 책방 견학을 광주나 순천까지 다녀온다는 것이다.
여름과 가을에 준비하여 겨울에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열었다. 생태 관련 도서를 500종 고르고 추천의 글을 쓰느라 가을 저녁이 바삐 흘렀다. 책방 옆이 바로 논이고 10분만 걸어 나가면 섬진강이니, 습지 생태를 관찰하고 체험하는 데 이보다 좋은 곳은 드물다. 책 속에 담긴 마을과 자연을 책방을 나서자마자 확인할 수 있다.
책방 문을 여니, 남원과 구례와 하동 사람들이 이웃 동네 산책 오듯 책방에 들렀고, 섬진강 여행객들도 일부러 찾아오기 시작했다. 매달 저자와의 대화를 하고,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책방은 동네 사랑방이자 마을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영화제와 책방을 꾸려가다 보면, 마을에 대대로 전하는 이야기와 풍속을 종종 접한다. 곡성은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고, 마을마다 백년은 거뜬히 넘긴 나무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죽곡면 삼태 마을에 들른 오후, 고목을 벨 때 반드시 지켜온 풍속을 들었다. 마을에서 가장 후덕한 노인이 목욕재계하고 왼새끼를 꼰다. 새끼줄을 고목과 고목의 씨로 자란 치목(어린나무)을 연결하여 묶는다. 닷새 동안 두 나무가 사귀도록 둔다. 고목의 신이 치목으로 건너가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고목을 베기 전 극진하게 제사를 지내고, 벤 후엔 주변 흙으로 그루터기를 어루만지듯 닦는다. 그날부터 치목의 나이를 고목의 나이까지 더하여 매기고, 고목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치목을 받든다. 이렇게 해야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잘 못 건드려 생기는 재앙 즉 ‘동티’가 마을에 나지 않는 것이다.
2024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안에서 지역 서점 활성화 및 지원을 위한 예산 11억원이 전액 삭감되었다고 한다. 문체부에선 디지털 도서 물류 지원 사업 예산 12억5천만원을 지역 서점을 위해 신규로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동네책방의 활동 방식과 마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엉뚱한 변명이다.
동네책방은 편리함과 신속함을 앞세우지 않는다. 안방에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고 주문한 책을 당일 택배로 받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서로 만나 눈을 보며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우주의 신비까지 이야기 나누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내는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바로 동네책방이다. 그 소중하고 따듯한 발길과 손길의 마중물과 반딧불을 하루아침에 없앤 것이다.
마을에 있던 것을 없애거나 해오던 일을 바꿀 때는 거듭 모여 의논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디지털에 물류 운운하며 도끼부터 들 일이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동티가 난다. 한심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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