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락사스에게서 배우는 한반도 평화의 길

고명섭 2023. 9. 1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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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의 카이로스][고명섭의 카이로스]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통일의 길을 닦아나가려면 상대를 악으로 보기 전에 내 안의 그림자를 먼저 보아야 한다. 반공웅변으로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정글을 헤쳐 나갈 수 없고 큰 나라들의 전략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함을 키울 수 없다. 나의 선함만 앞세우면 남는 것은 대극의 충돌뿐이다.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카를 구스타프 융(왼쪽)과 융의 글에서 대표작 ‘데미안’의 아이디어를 얻은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 위키미디어 코먼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는 소설 ‘데미안’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다. 이 소설이 문학상을 타자 헤세는 실명을 밝히고 상을 반납했다. ‘데미안’은 전후 독일 젊은이들의 마음을 오래 붙들었고 헤세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아브락사스라는 낯선 신이 나오는 친구 데미안의 편지다. 편지의 짧은 글은 상징과 비유로 차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헤세는 어디서 이 신에 관한 생각을 얻었을까? 헤세가 아브락사스를 만나게 된 경위를 보려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스위스 베른에 살고 있던 37살의 헤세는 전쟁이 나자 독일군 입대를 자원했다.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동안 따뜻한 벽난로 곁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의무감이 헤세를 떠밀었다. 하지만 눈이 나쁘고 나이가 많은 데다 식구가 딸렸다는 이유로 지원은 반려됐다. 후방의 헤세는 독일군 포로들에게 책과 잡지를 보내는 인도주의 사업에 뛰어들어 의무감을 대신했다.

전쟁을 보는 헤세의 눈은 곧 바뀌었다. 젊은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참혹한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있는가. 헤세는 1914년 11월 반전평화를 주장하는 글을 스위스 신문에 기고했다. 그 글에서 헤세는 유럽인들에게 각국의 정부와 군대가 강요하는 분열을 극복하자고 호소하고, 독일인들에게는 국수주의적 광란에 맞서 인류애와 이성을 되찾자고 촉구했다. 포성이 난무하는 와중에 발표된 헤세의 반전 호소문은 거센 역풍을 불렀다. 헤세는 애국주의에 들뜬 독일인들의 공적이 됐다. “안전한 중립국에서 비판만 하는 비열한 징집 기피자”라고 헤세를 비방하는 익명의 기고문이 독일 신문에 실렸고 이 글이 독일의 다른 신문들에 인용돼 퍼져 나갔다.

여론에 난타당한 헤세는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염탐한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리다 우울증의 수렁에 빠졌다. 여기에 가족 내부에서 벌어진 고통스러운 일들이 가세했다. 헤세의 세 살 난 아들이 뇌병에 걸려 잠을 자지 않고 날뛰었다. 아들을 돌보던 헤세 부인도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1916년 3월에는 헤세와 평생 불화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죄의식이 자살충동에 이르자 헤세는 모든 활동을 접고 루체른의 시립요양병원에 입원했다. 동시에 정신과 의사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에게서 정신분석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헤세의 분석치료는 2년 가까이 계속됐다.

랑은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의 정신분석 이론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랑과 헤세는 일주일에 한번씩 3~6시간 만났다. 랑의 분석치료는 환자의 마음을 치유하는 행위이자 지성이 고도로 계발된 사람들끼리 벌이는 지적인 토론이기도 했다. 융의 제자로서 랑은 융 이론을 소개하고 헤세와 함께 융의 글을 읽었다. 바로 그 시기에 헤세가 랑에게서 받아 읽은 글 가운데 ‘죽은 자들에게 주는 일곱 편의 설교’라는 융의 글이 있었다. 헤세는 그 글에서 처음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융이 그 글을 쓴 때는 인생 행로의 최저점을 막 통과한 뒤였다. 그 3년 전 융은 아버지와도 같던 프로이트와 결별해 프로이트학파의 황태자라는 지위를 잃었다. 무력증에 시달리던 융은 지식고고학자처럼 고대의 영지주의 세계를 탐사했고, 거기서 독자적인 심층심리학을 세우는 데 뼈대가 될 수많은 자재를 발굴했다. 고대 근동에서 시작된 영지주의는 기독교 탄생 뒤 그 신생 종교와 결합해 기독교 영지주의로 발전했다. 기독교 영지주의는 세상을 뒤덮은 악의 기원을 ‘구약성서’의 신에게서 찾았다. 유대인들이 받든 그 신이야말로 이 세상과 세상의 악을 창조한 신이며, 진정한 신은 그 구약의 신을 초월한 천상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이 기독교 영지주의 신앙의 핵심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 보이지 않는 최고신을 알아보는 ‘영지’(그노시스, gnosis)를 얻음으로써 우리 안의 신적인 정신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융은 1916년 여름 어느 날 자신을 강타한 영감에 사로잡혀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일곱 편의 글을 썼다. 그 글을 묶어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영지주의자 바실리데스의 이름으로 인쇄해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냈다. 그것이 바로 랑과 헤세가 읽은 ‘죽은 자들에게 주는 일곱 편의 설교’였다. 이 소책자에서 융은 아브락사스를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한 최고신, 구약의 신 너머에 있는 참된 신으로 묘사했다. 융이 그린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같은 온갖 대립하는 것을 통합한 신이다. 융의 글은 아브락사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브락사스는 알기 어려운 신이다. 사람들은 태양에서 선의 총화를 볼 수 있고 악마에게서 영원한 악을 볼 수 있지만, 아브락사스에게서는 한없이 불확실한 삶을 볼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의 어머니다. 아브락사스는 태양이며 동시에 악마다. 아브락사스의 힘은 양면적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신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대의 눈에는 그 대극의 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융이 영지주의의 우주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융은 영지주의자들이 믿은 천상의 세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영지주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무의식 세계에서 벌어지는 내면의 드라마로 바꾸었다. 융의 그 글을 읽고 헤세는 ‘데미안’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의 자아는 내면의 모험을 거쳐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려면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의 대극을 넘어서야 한다. 대극을 넘어선다는 것은 우리의 선한 자아 안에서 그 선의 뒷면인 악을 발견하고 그 악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안의 불완전한 선과 그 선이 만든 어둠을 투명하게 인식함으로써 선과 악의 대립을 넘어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실현하는 것이다.

융의 심층심리학이 말하는 ‘그림자’가 바로 우리 안에 머무는 악이다. 우리가 밖에, 타자에게 투사하는 악은 우리 안에 있는 자아의 그림자다. 그 악이 우리 안에 있기에 그토록 우리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헤세의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악동 크로머가 바로 싱클레어라는 선한 자아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를 대면하고 인식하여 통과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림자에 붙들려 있게 된다. 그렇게 우리 안에 이미 악이 있음을 알아볼 때, 우리는 악을 모조리 외부로 돌리고 나를 선 자체라고 여기는 의식의 유아적 관성을 떨쳐버릴 수 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데미안은 외부의 어떤 인물이 아니라 내면에서 싱클레어 자신을 이끌어주는 힘이다. 그 데미안이 싱클레어가 내면의 여행을 통해 마침내 만나야 할 자기, 곧 심층의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대극의 합일을 거쳐 이룬 자기실현을 상징한다.

대극의 합일은 우리의 내면적 삶에 한정되지 않는다. 크게 보면 나라의 온전함도 대극의 통합에 달렸다. 남과 북은 너무나 오랫동안 적대했고 저마다 선을 자처하면서 상대를 악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악은 자기 내부의 그림자를 투사해 확대한 것이다.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통일의 길을 닦아나가려면 상대를 악으로 보기 전에 내 안의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 우리 헌법은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에게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성실히 힘쓸 것’을 의무로 새겨 놓았다. 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이 국익을 놓고 다투는 동북아 한복판에서 그 의무를 다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통일은 둘째 치고 평화도 지키기 어려운 형세다. 한·미·일은 한반도의 분단선을 영구화하겠다는 듯 삼각군사동맹을 향해 내달린다. 여기에 맞서 북·중·러의 밀착이 강도를 높이고 있다. 반도의 끊어진 허리가 신냉전의 최전선이 되고 만 꼴이다. 지금의 대결이 브레이크 없이 계속된다면 불티 한 점만으로도 열전의 도화선에 불이 붙을 수 있다. 대극의 반전이 일어나야 한다. 타자를 악마화하기 전에 자기 내부의 악을 보아야 한다. 내 안의 철부지 어린아이가 내지르는 반공웅변으로는 냉엄한 국제정치의 정글을 헤쳐 나갈 수 없고 큰 나라들의 전략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함을 키울 수 없다. 그래서는 한반도 평화의 길을 찾을 수도 없다. 나의 선함만 앞세우면 남는 것은 대극의 충돌과 자멸이다.



고명섭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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