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단절’ 자립준비청년 “세상에 또다시 버려진 기분” [심층기획-‘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조희연 2023. 9. 1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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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아이 못 지키는 사회
보육원서 지어준 이름 ‘백새별’
의지할 곳 없이 가족 같던 시설 퇴소
홀로서기 막막… 고립감에 극단선택
부모에 대한 원망 뒤엔 그리움
성인된 후 생모 찾았지만 만남 거절
“왜 버렸는지 묻고 싶었을 뿐인데…”
정부 ‘정신적 지원체계’ 시급
“퇴소 후 진로·취업·인간관계서 좌절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최후 보루 필요”
“1998년 1월17일 출생 추정. 미혼모.”

갓난아기 때 보육원으로 보내진 백새별(25)씨가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해 아는 건 보육원 입소 시 작성된 아동카드 내용이 전부다. ‘백새별’이라는 이름도 부모가 아닌 보육원에서 지어줬다. 부모가 친권을 포기하면서 새별씨의 후견인이 된 보육원 원장은 자신의 성인 백씨로 새별씨의 성·본 창설을 신청해 출생등록해줬다. 같은 이유로 이 보육원에서 출생등록된 80여명의 아이들 모두 백씨 성을 갖고 있다.

시설에서 같은 성씨를 공유하며 ‘가족’처럼 지내던 이들은 성인이 돼 자립하는 과정에서 ‘혼자’임을 체감하기 시작한다. 새별씨는 12일 세계일보 취재진에게 “다른 사람들은 있는 ‘기둥’이 저한테는 없다”고 토로했다. 새별씨가 가리킨 기둥은 경제적, 심리적인 지지 기반을 의미한다.

새별씨는 시설 퇴소 후 4번의 극단적 선택을 했다. 첫 시도는 22살, 2년 동안 모은 돈을 한 달 만에 소진했을 때였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 전 재산 1000만원을 들고 제천으로 향한 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니 돈은 금방 동이 났다. 하루 13시간씩 아르바이트하며 2년 동안 모은 돈이 사라지자 ‘살기 싫다’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극단적 선택을 한 그날 새별씨는 다행히 구조됐지만 그 뒤로도 ‘나 혼자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를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새별씨는 이런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게 익숙하지 않다. 3년 전 아르바이트하던 수영장 사장이 그를 성폭행했을 때도, 홀로 견뎠다. 경찰서에 신고했다가도 당시 상황을 곱씹기 괴로워 조사를 거부하고 머물던 쉼터로 돌아갔다. 새별씨를 찾아온 경찰을 보며 놀란 쉼터 관계자와 친구들에게 그는 “아무 일도 아니다”고 답했다.

새별씨처럼 부모와 완전히 단절된 유기 영아들은 가족과 국가로부터 외면당한 채 외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이들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정책적 배려나 정신적 지원 체계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백새별(25)씨의 제천영아원(0∼5세 기아 수용 기관) 아동카드. 발생 경위에는 ‘기아’, 생년월일은 1998년 1월17일 ‘추정’이라고 표시돼 있다. 특기사항에는 “외할머니, 이모가 데리고 왔다”며 “미혼모”라고 적혀 있다. 백새별씨 제공
보육원 출신으로 현재 자립준비청년 상담센터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임혜림(25)씨는 “부모와 단절된 자립준비청년은 힘들 때 기댈 ‘최후의 보루’가 없다”며 “너무 많은 친구들이 최후의 보루가 없어 삶을 포기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누구나 성인이 되고 자립할 때 어려움을 겪는데, 가족이란 울타리가 희미한 이들은 그 고통이 배가된다는 설명이다.

자라면서 커지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그런 고통 중 가장 대표적이다. 부모에 대한 궁금증으로 엄마, 아빠를 찾아나서지만 현실적으로 만남이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 새별씨는 2021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부모를 찾기 위해 보육원에 다녀왔다. 버스를 타고 보육원에 가던 그날, 머릿속으로 ‘엄마, 아빠가 죽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부모님이 죽기 전 나를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다.

무슨 대화를 이리도 간절히 원했던 걸까. 새별씨는 “두 가지만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왜 시설에 맡겼냐’, ‘시설에 맡길 거면서 왜 나를 낳았냐’는 물음이다. 그는 “차라리 낳지 말지, 왜 낳아서 시설에 맡겼는지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

다만 새별씨가 부모를 원망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원망의 외피를 걷어내면 그 안에는 극도의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다. 새별씨는 “(부모님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IMF 경제위기가 1997년도에 터졌잖아요. 제가 1998년에 태어났거든요.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시설에 맡겼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많이 해봤어요. 그냥, 보고 싶어요.”

새별씨와 같은 보육원 출신인 백강석(24)씨도 지난해 부모를 찾기 위해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관은 “엄마 이름이 특이해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말을 건넸다. 그리고 실제로 강석씨 생모를 찾아냈다. 하지만 강석씨가 만날 수는 없었다. 강석씨 생모가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거절 의사를 표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생모에 대한 정보를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경찰이 가진 친부 기록도 없어서 생부에게는 접촉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자립준비청소년 245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작성한 시설퇴소청년 생활실태조사 보고서(2022년)에서 “(자립준비청년은)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 진학 및 취업 등에 실패해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도움 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사회적 고립감이 클 수밖에 없고 은둔 생활로 이어질 수 있는 이들을 위해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증진 및 심리·정서 안정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씨 역시 이런 청년들이 어려움을 느낄 때 “손을 뻗어 하소연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설에 있을 때부터 어떤 지원기관에 연락하면 되는지 말해주고, 자립준비청년이 마음을 열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조희연 기자 ch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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