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칼럼] 본 적도 없는 6촌이 `동일인`, 지금이 씨족사회인가
반도체와 가전 세계 1위인 삼성전자가 매물로 나오더라도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한국에서 회사를 경영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추정 재산만 2조달러(약 2655조원) 이상이니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유는 바로 친척이 많아서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공정거래법 상 '동일인 지정제도'라는 것이 있다. 비슷한 제도라도 있는지 찾아보려고 여러 경제단체와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는데 결론은 '없었다'. 이 제도는 소위 '재벌'을 견제하기 위한 가장 큰 장치 중 하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동일인을 지정해 배우자와 6촌 이내의 혈족, 4촌 이내의 인척(개정안에서는 4촌 이내의 혈족 및 3촌 이내의 인척과 자녀 있는 사실혼의 배우자 포함), 회사 임원, 이들이 지배하는(30% 이상 지분 소유) 기업도 포함한 주식 상황 등을 매년 보고 받는다. 만약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거나 내용이 틀릴 경우 동일인을 '형사처벌'한다.
동일인이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 어디에도 정의돼 있지 않다. 통상 기업집단의 실질적 소유주인 즉 '총수'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뿐이다. 10대 그룹에 해당하는 대기업집단의 지주회사에 다니는 임원조차도 "도대체 동일인이라는 말의 뜻이 뭔지도 모르겠다"고 하소연할 지경이다.
다시 빈살만으로 돌아오면, 사우디 왕실의 왕자 수는 7000여명이고, 왕족은 1만5000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친족 기준으로 보면 6촌은 증조부모만 같고 조부모가 다른 경우인데, 할아버지의 사촌형제의 손자·손녀가 이에 해당한다. 거의 남남이다. 여기에 경영승계 과정에서 분쟁이라도 있었다면 이는 남보다도 못한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이들에게 자료를 요청하고 검증하고 동의를 받으려면 엎드려 빌어도 될까말까다.
이 제도는 1986년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시작됐는데, 당시에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정부 주도의 경제 성장 과정에서 소위 재벌에 대한 부의 편중이 극심해졌고, 이에 따른 부정부패와 불공정경쟁 등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를 제어한다는 명분의 '칼'로 이 제도가 만들어졌다.
시대가 바뀌면서 2000년대 이후 공시제도가 강화되면서 기업 경영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투명해졌다. 그리고 동일인 규제 대상에 해당하는 자산규모 5조원 이상 기업들은 대부분 수출 중심의 사업구조로 바뀌었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제도는 오히려 강화됐다. 2020년에는 '고발지침'까지 만들어 동일인에게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자료를 정확히 제출하라고 의무화 하는 것은 물론, 허위로 확인될 경우 모든 법적 책임을 동일인에게 지도록 했다. '손 안대고 코 푸는' 격이다.
이런 억지스러운 제도를 운영하다보니 여러 비상식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2019년 4월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차기 총수를 정하지 못하고 갑자기 타계하자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는데, 매년 5월에 기업집단 현황을 공개하는 공정위가 지정 발표일을 연기한데 이어 심지어 직권으로 동일인을 지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마치 공정위가 재벌 총수 후계자를 지명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웃픈' 상황이 연출됐다.
2021년 기업집단 지정에서는 쿠팡이 자산총액 5조원을 넘기면서 신규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됐는데, 김범석 쿠팡 의장이 외국인이라는 이유에서 동일인 지정제도 규제를 피해갔다. 그러자 경제단체는 물론 전문가들도 쿠팡의 사례가 사실상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40년 묵은 '갈라파고스 규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킬러규제는 우리 민생경제를 위해 빠른 속도로 제거돼야 할 것"이라며, 특히 공직자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킬러규제 혁파가 "민간투자 활성화와 역동적 시장경제 회복을 위한 첩경"이라고도 했다.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소폭 상승했다.
아직 혁파해야 할 킬러규제에 동일인 지정제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경제 회복도 아직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때처럼 확장재정을 할 여력도 없다. 현재로서는 더 과감한 규제개혁과 치밀한 정책운영으로 외국계를 포함해 모든 기업들이 투자할 만한 나라로 만드는 게 최선이다. 윤 대통령이 기업들의 투자를 늘리기 위해 어떤 '킬러규제' 카드를 또 내놓을 지 기대된다.
박정일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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