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 신고 2번, 접근금지…그리고 스토킹범이 집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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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7일 새벽 5시53분 설아무개(30)씨는 인터넷에서 미리 구매한 어른 팔뚝 만한 길이의 흉기를 상의 소매 안에 넣어 숨긴 채 인천 남동구 논현동의 한 아파트를 찾아가 피해자 이은총(38)씨를 기다렸다.
한겨레가 확인한 검찰 공소장과 유족 설명을 종합하면, 설씨가 출근하던 은총씨에게 “대화 좀 하자”고 했다. 은총씨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느냐”고 답하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비명을 들은 은총씨 어머니가 속옷바람으로 나왔을 때 딸은 쓰러진 상태였다. 은총씨 얼굴을 향한 흉기를 막으려던 어머니는 그새 집밖으로 나온 손녀를 보호하려고 몇 발자국 옮긴 찰나에, 은총씨가 흉기에 찔렸다.
‘괜찮다’고 밝게 말하던 은총씨는 7월13일 경찰에 스마트워치를 반납했고 나흘 만에 설씨에게 살해당했다. 사건이 발생한 뒤 12일 뒤, 경찰은 유족에게 전화로 “(은총씨가 스마트워치를 안 해도) 괜찮다고 했어요. 워낙 목소리가 밝잖아요”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14일 신당역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스토킹처벌법의 한계가 수차례 지적됐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 폭행 신고 2번, 접근금지 1번…징조는 여러 번 있었다
먼저 두 차례의 폭행 신고가 있었다. 은총씨와 설씨가 만나기 시작한 때는 지난해 6월. 불과 3개월이 지난 뒤부터 삐걱거렸다. 은총씨가 헤어지자고 하자 설씨가 붙잡았고 다시 만남은 이어졌다. 은총씨가 있던 직장으로 설씨가 옮겨간 것은 지난해 12월, 그때부터 폭행이 시작됐다. 이혼 경험을 직장 동료에게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던 은총씨에게 설씨가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올해 2월께 급기야 은총씨를 때려 갈비뼈를 부러뜨렸다. 헤어지자고 해도 “죽어버리겠다”고 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은총씨가 설씨를 막으며 때렸기 때문에 ‘쌍방 폭행’이라며 사건은 무마됐다. 어쩔 수 없이 설씨에게 잡히는 날이 계속되던 5월, 또다시 은총씨는 폭행을 당했고 경찰에 스토킹 사건까지 함께 신고했다. 이번엔 정말 떼어놓으려고 했는데 직장이 발목을 잡았다.
은총씨는 이 직장을 13년 다녔다. 팀원 수십명을 이끄는 팀장이었다. 곧 진급을 앞두고 있기도 했다.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여섯살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설씨가 스토킹을 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설상가상으로 설씨는 경찰 신고를 당한 뒤인 6월1일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은총씨와 만났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직장 동료들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직장 상사와 “(설씨를) 다른 지점에 보내는 쪽으로 좋게 마무리하자”고 합의했고 고소를 취하했다.
설씨는 집요해졌다. 고소를 취하한 6월2일 은총씨의 아파트 주차장에 찾아가 기다렸다. 차를 타고 출근하는 은총씨의 뒤를 바짝 붙어 위협적으로 쫓아가기도 했다. 결국 6월9일 지하주차장에 있던 설씨는 은총씨 가족들의 신고로 붙잡혔다. 이튿날 인천지방법원에서 8월9일까지 접근·연락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잠정조치 결정을 받았다. 4시간 만에 풀려난 설씨가 직장 동료에게 하는 말은 “이제 나왔다. 괜히 와서 날벼락”. 잘못한 걸 깨닫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설씨는 은총씨 곁을 맴돌았다. 은총씨와 가족들은 물론, 경찰도 이 사실을 몰랐다. 설씨의 범죄일람표를 보면, 7월 13∼17일 5차례나 은총씨가 살던 아파트 복도에 있었다. 설씨를 다른 지점에 보냈다고 한들, 이미 은총씨의 직장과 집 주소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경찰은 은총씨의 스마트워치를 회수해갔다. 경찰 설명으로는 은총씨가 먼저 찾아와 스마트워치를 반납하겠다고 했다지만, 유족들은 6월29일 경찰이 은총씨 어머니를 찾아와 ‘스마트워치를 반납해도 된다’고 안내했다고 말해 진술이 엇갈린다.
경찰이 은총씨가 숨진 뒤 어머니와 통화한 내용을 보면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스마트워치 등을 계속 체크하는데 (은총씨가) 저랑 통화할 땐 목소리도 되게 밝고, 회사에서 조치를 해줘서 전혀 마주칠 일도 없다고 답변했다”고 말했다. 은총씨 어머니는 “원래 스토킹하는 사람들이 살인하기 전에 한달은 잠적한다는데 왜 한달도 안 됐을 때 와서 반환할지, 연장할지를 물어보는 거냐, 그게 문제 아니냐”로 토로했지만, 경찰은 “(은총씨가) 괜찮다고 했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 스마트워치 제공하면 역할 끝?…피해자 보호 아직도 요원
스마트워치가 문제였을까. 신당역 살인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112시스템에 등록은 돼 있었지만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별다른 조치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스마트워치를 반환한다거나, 적극적으로 피해를 호소하지 않으면 사실상 보호조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마트워치는 피해자에 대한 실시간 위치추적기능과 긴급할 때 112 신고 기능이 핵심이다. 정작 가해자에 대한 ‘워치’는 없는 셈이다.
은총씨의 사촌언니 ㄱ씨는 한겨레에 “스마트워치를 반납한 이유가, (설씨가) 동선 안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하고 나니까 스마트워치로 피해자의 동선을 따져서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가해자(설씨)의 동선을 파악했더라면 예방도 가능했겠지만, 나중에 범행을 실행했더라도 사건을 증명할 때 쓰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유족들은 스마트워치를 제외한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은총씨를 보호했던 제도가 없었다는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나마 ‘스토킹 피해자만 주의해야 한다’는 비판에 법 개정이 이뤄져 내년 1월부터 스토킹 가해자에 대해 전자발찌 착용을 처분해 접근금지 등을 위반할 경우 알림이 가는 제도가 시행될 예정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어느 정도 접근했을 때 경고음을 발생하고 출동할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당역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뒤 스토킹 범죄에 대한 인식이 바뀌며 신고는 폭증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22년 스토킹 신고 건수는 2만9565건으로 1년전(1만4509건)에 견줘 2배 늘었다. 올해 7월까지도 1만8973건의 신고가 접수돼, 이미 2021년 한해 신고 건수를 훌쩍 넘었다.
접근금지 등 경찰의 잠정조치 신청 건수는 신당역 사건이 발생한 지난해 9월 전후로 늘었다. 경찰의 잠정조치 4호(유치장 구금) 신청건수는 사건 발생 다음달인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7월까지 10개월간 980건으로, 앞선 10개월(2021년 12월~2022년 9월)간 수치(776건)와 견주면 크게 늘었다.
같은 기간 법원의 구금 인용률도 45.1%에서 54%로 올랐지만, 여전히 스토킹 정도가 심하다고 판단돼 구금 신청된 가해자의 절반 가까이는 언제든 피해자에게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구금과 같은 인신 구속에 준하는 조처에 법원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단 뜻이다. 2호(접근금지), 3호(연락금지)의 법원 인용률은 90%대로 높은 편이지만 가해자가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잠정조치 2·3·4호 처분을 받은 피의자가 잠정조치를 위반한 건수는 신당역 사건 발생 이후인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7월까지 494건에 달했다. 잠정조치 기한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다. 접근·연락금지는 기본 2개월에 연장했을 때 최장 6개월, 유치장 구금은 1개월을 초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피해를 적극적으로 호소하거나 반복적인 스토킹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으면, 스토킹처벌법상 보호를 받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올해 5월 발생한 서울 금천구 보복 살인 사건은 경찰이 애초에 발생한 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반복적으로 만남을 강요·협박하는 등 정황이 없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았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다가 가해자가 곧장 보복 살인을 한 경우다. 이에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스토킹 범죄를 처벌한 법적 근거가 뚜렷하지 않다는 한계가 지적되곤 했다.
■ 스토킹 신고 불만 갖고 살해했는데…‘보복 살인’ 아니다?
설씨 사건의 경우 죄명이 ‘보복 살인’이 아닌, ‘살인’이 된 것도 유족들은 답답한 부분이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특가법)상 보복살인은 징역 10년 이상이 규정으로, 형법상 살인죄(최소 징역 5년)보다 형이 무겁다. ㄱ씨는 “(경찰 설명을 듣기로는) 어떤 법적 제재로 살인했다는 걸 인정해야만 보복 살인이 된다는데, 가해자는 ‘보복심 때문에 죽인 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ㄱ씨는 “스토킹 살인사건은 모두 보복 살인 사건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은총씨가 당한 스토킹은 사실상 보복 심리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공소장을 보면, 설씨는 “서로 결별한 이후에도 직장 내에서 피해자(은총씨)가 모른 척하며 무시한다고 생각해 배신감을 느끼고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간 수사기관은 아무 설명이나 노력이 없었고, 설씨는 결국 살인이라는 죄명으로 법정에 올라간다. 유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엄벌 촉구 탄원서’를 모으는 것이다. 유족한테 한 차례도 연락이 없던 설씨는 최근 한달새 재판부에 5차례에 걸쳐 반성문을 제출했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현실적인 벽과 싸우는 동안, 그 가족은 무너져갔다. 사건 당일 설씨가 휘두르는 칼을 손으로 막다가 손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서 손녀가 오지 못하게 막아야 했던, 딸이 칼에 찔린 채 죽어가는 걸 둬야 했던 은총씨 어머니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은총씨의 여섯살 딸은 말을 잃었다. 얼마 전엔 친할머니에게 “엄마가 어떻게 됐는지 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날 새벽처럼 출근한 것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딸’ 때문이었다. 스토킹에 시달리면서도 은총씨는 딸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 조카가 컸을 땐 더 안전한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뿐입니다.” 은총씨의 사촌언니는 울먹거리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주 화요일인 19일 설씨의 첫 공판이 열린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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