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쿠데타 50주년, 좌우로 분열된 칠레…"단죄해야"vs"불가피했다"

김성식 기자 2023. 9. 1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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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치 대통령, 희생자 추도식 엄수…"최소 3200명 살해·실종·고문 당해"
17년 독재 피노체트 두고 엇갈린 평가…"안정된 치안으로 경제성장 이룩"
군부 쿠데타 발발 50주년을 맞은 11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라 모데나)에서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다. 2023.9.11. ⓒ 로이터=뉴스1 ⓒ News1 김성식 기자

(서울=뉴스1) 김성식 기자 = 군부 쿠데타 발발 50주년을 맞은 칠레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식이 거행된 가운데 쿠데타를 일으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두고 칠레 국민들이 둘로 쪼개졌다. 좌파 진영에선 못다 한 과거사 청산을 통해 독재 정권을 제대로 단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우파 진영에선 독재 정권 수립이 오히려 칠레 경제의 초석을 닦는 계기가 됐다고 옹호했다.

로이터·AFP 통신에 따르면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라 모데나)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해 군부 쿠데타에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렸다.

보리치 대통령은 "피노체트 독재 17년간 최소 3200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되고 수만명이 고문을 당했다"며 "인권을 침해한 자들은 지금이라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최근 과거를 잊고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라고 권유하는 이들이 있다"며 "진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밝은 미래는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1973년 9월 당시 칠레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피노체트는 전차와 전투기를 몰고 라 모데나를 급습했다.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를 연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피노체트의 회유를 거부하고 측근들과 남아 결사 항전을 벌인 끝에 사망했다. 칠레는 이후 17년 간 피노체트의 악명 높은 군부 독재에 시달려야 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멕시코, 콜롬비아, 볼리비아, 우루과이 대통령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50년 전 라 모데나에서 전투기 폭격과 군홧발에 짓밟힌 이들을 위해 1분간 묵념했다. 아옌데 전 대통령의 딸인 이사벨 아옌데 상원의원은 연설에서 "오늘날 전 세계의 민주주의가 새로운 권위주의적 위협에 직면했다"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헌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군부 쿠데타 발발 50주년을 맞은 11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라 모데나)에 군부가 폭격에 사용한 비행기가 투사된 모습이다. 당시 칠레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축출했고 이 과정에서 라 모데나에 폭격을 퍼부었다. 2023.9.11. ⓒ AFP=뉴스1 ⓒ News1 김성식 기자

보리치 대통령은 전날 산티아고에서 열린 추모 행진에도 현직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참석했다. 검은 옷을 입은 6000명의 시민들은 보리치 대통령과 함께 '다시는 민주주의가 폭격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란 구호를 외치며 밤새 거리를 누볐다. 좌파 성향의 보리치 대통령은 평소 아옌데 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임을 자처해 왔다.

한편 피노체트를 옹호하는 시민들은 비슷한 시각 라 모데나에 설치된 희생자 추모비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맞불 집회를 벌였다. 이들이 추모 행렬과 마찰을 빚는 바람에 6명이 다치고 11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칠레 우파 연합인 독립민주연맹(UDI)은 11일 쿠데타 50주년 기념 성명을 내고 "아옌데 전 대통령의 실정으로 인해 쿠데타는 불가피했다"고 항변했다. 3년간 지속된 아옌데 정부는 급진적인 변화를 시도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반면 피노체트 집권 기간엔 칠레가 안정된 치안을 바탕으로 남미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업체 풀소 시우다디노가 쿠데타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3.4%는 쿠데타가 칠레 국익에 부정적이었다고 답한 반면 이득이 됐다는 평가도 30.2%나 됐다. 또한 정부 차원의 희생자 추모행사가 칠레의 국민 분열을 가중한다는 응답은 70.1%에 달했다.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는 1990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칠레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확인되자 비로소 끝이 났다. 피노체트는 가택 연금 상태에 2006년 사망했다. 일부 군 장교와 비밀경찰이 고문, 납치, 살해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투옥한 것과 대조된다.

칠레 인권위원회에 따르면 피노체트 재임 기간인 1974~1990년 정치적인 이유로 처형, 실종, 투옥되거나 고문을 당한 이들은 4만175명에 달한다. 1000여명은 유해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실종된 상태이며 수천명은 해외로 망명을 떠났다.

칠레에서 피노체트 정권 희생자 유가족 협의회를 이끌어 온 개비 리베라는 "완전한 정의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라며 "실종된 이들을 마저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개비의 아버지 루이스 리베라는 1975년 11월 납치돼 행방불명된 상태다.

군부 쿠데타 발발 50주년을 맞은 11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국립 경기장에서 시민들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피노체트 재임 기간 이곳 경기장 건물에선 고문과 구금이 이뤄졌다. 2023.9.11. ⓒ 로이터=뉴스1 ⓒ News1 김성식 기자

seongs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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