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증하는 해외 원조 예산, ‘일단 쓰고 보자’ 집행에 수백억원 낭비
한국 정부가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해 매년 수조원씩 집행하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 상당수에서 관리 부실로 사업 혼선과 예산 낭비가 발생하고 있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가 12일 나왔다. 한국은 과거에는 원조를 받는 국가였으나 최근에는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로 변모했다. 이를 위한 ODA 예산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10년에는 1조3411억원이었으나 지난해에는 4조425억원으로 12년 새 3배로 늘었다. 정부는 내년에 ODA로 6조5000억원을 지출하겠다는 내용의 예산안을 이달 초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ODA 예산을 제대로 쓰기 위한 제도와 절차는 아직 미흡해 곳곳에서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이 감사원 지적이다.
감사원이 12일 공개한 ‘공적개발원조(ODA) 사업 추진 실태’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에너지 분야 무상 원조 사업을 감독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산업기술진흥원(산업진흥원)은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사업이 진행될지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업 시행 기관들이 관련 물자를 사들이는 등 108억여 원을 미리 쓰는 것을 방치했다. 콜롬비아 보고타의 저소득층에게 가스 및 태양광 발전기로 생산한 전기를 공급해 주는 사업은 콜롬비아 측과 사업 계획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기도 전에 발전 설비 58억원 어치를 사들였는데, 콜롬비아 측이 가스 발전은 필요 없고 태양광 발전만 필요하다고 나오면서 이미 사들인 가스 발전 설비가 사장될 상황이 됐다. 콜롬비아 비야비센시오에서 운행되는 노후 트럭과 버스 380대에 배출 가스 저감 장치를 달아주는 사업은 시행자인 한국자동차연구원이 21억여 원을 들여 저감 장치 190대를 미리 사들였는데, 콜롬비아 측이 단 3대에만 장치를 달아 시범 운용을 하겠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나머지 187대가 한국 내 창고에서 방치되게 됐다. 미얀마와 타지키스탄, 온두라스를 대상으로 하는 원조 사업에서도 시행자들이 27억여 원어치 물품·용역을 성급하게 사들였으나 사업 진행이 늦어지면서 방치되고 있다.
이런 무상 원조 사업은 사업을 시행하려는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미리 사업 계획을 세워 외교부의 심의와 국무총리 주재 개발협력위원회의 의결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감사원이 각 기관이 실제로 시행하고 있는 무상 원조 사업을 당초 계획과 비교해 보니, 사업이 외교부와 총리실에 당초 보고된 계획대로 시행되지 않고 엉뚱한 내용으로 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진흥원은 에티오피아에 발전 용량 250㎾(킬로와트) 규모의 태양광 발전기와 30㎾ 규모의 바이오매스 발전기를 설치해 주는 ‘친환경 에너지 타운 조성 사업’을 해주겠다며 2016년 개발협력위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현지에는 바이오매스 발전기가 아니라 같은 용량의 디젤 발전기가 설치됐다. ‘국산 바이오매스 발전기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산업진흥원은 라오스에도 441.6㎾ 규모 태양광 발전기와 25㎾ 규모 소수력 발전기를 설치하겠다며 2017년 사업을 승인받아 놓고, 나중에 계획을 임의로 바꿔 현지에 소수력 발전기 대신 디젤 발전기를 설치했다.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디젤 발전기를 제공하면서, 에티오피아와 라오스에 대한 원조 사업은 ‘친환경 에너지’ 사업으로 보기 어렵게 됐다.
한국 정부는 미얀마를 대상으로 9개의 원조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2021년 2월 미얀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내전이 뒤따르자 정부는 그해 10월 6개 사업은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산업진흥원은 정부 결정을 무시하고 한국전력이 미얀마 농촌에 태양광 발전 설비를 구축해주는 ‘에너지마을 구축 사업’을 계속 진행시켰다. ‘사업을 중단하면 예산이 깎이는데, 미얀마 정세가 호전돼 사업이 재개됐을 때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결과 한국전력이 사들인 태양광 모듈 등 9억여 원어치 설비가 창고에 방치되고 있다고 감사원은 지적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농촌진흥청은 여러 개발도상국에 농업 기술을 지원해주는 ‘해외 농업 기술 개발 사업’을 매년 수백억원을 들여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 사업 예산의 30%가량이 행정 경비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촌진흥청이 원조 대상 국가별로 진행할 사업 내용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인력을 파견하지 않고, 일단 현지에 사무소를 만들고 사람을 채용해 보낸 뒤 해당 국가에서 진행할 사업을 찾는 식으로 일을 벌였기 때문이다. 키르기스스탄·볼리비아·몽골·케냐·우즈베키스탄·우간다·알제리에 농촌진흥청이 개설한 사무소는 해당국에 대한 농촌진흥청 사업 예산의 30% 이상을 사무소 직원 인건비 등 행정 경비로 쓰고 있었다. 키르기스스탄 사무소는 22만 달러(약 2억9000만원) 규모 사업을 진행하는데 사무소 유지에 19만 달러(약 2억5000만 원)이 들었다.
감사원은 산업진흥원에는 무상 원조 사업 감독 업무를 게을리 한 담당 직원들을 징계하고, 농촌진흥청에는 각국에 개설한 사무소의 필요성을 재검토하라고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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