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나온 ‘토기’, 그 웃음과 감동의 드라마
아주 먼 옛날, 신라와 가야 사람들은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무덤 안에 흙으로 빚은 여러 가지 모양의 '토기'를 함께 묻어줬습니다. 사람, 동물, 사물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을 '상형토기'라고 부르는데요. 이 토기들은 망자의 다음 삶을 위한 상징적 의미가 담긴 제의용 그릇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담을 수 있도록 움푹 파인 부분이 있죠.
이것과는 종류가 다른 '토우장식 토기'라는 것도 있습니다. 토우(土偶)는 흙으로 빚은 인형입니다. 이런 토우들을 주로 그릇 뚜껑에 다양하게 장식한 것들이 또 제법 많습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에 가면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서 나온 다양한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무덤의 부장품을 모았으니 무거울 거라 지레 짐작하기 쉽지만, 실제로 전시를 돌아보면 느껴지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뜻밖의 볼거리들이 깨알 같은 재미까지 선사하죠.
■얼굴무늬 수막새만 '신라의 미소'가 아니다?!?
여기, 아주 귀여운 동물 모양 토기가 있습니다. 코를 보면 영락없는 돼지인데, 발가락은 개나 고양잇과 동물이죠. 전체적인 생김새로 보면 개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앞서 소개해드린 것처럼 상형토기는 기본적으로 '그릇'이라서, 이 토기 역시 뭔가를 끼울 수 있도록 등 부분이 움푹 파여 있습니다.
6세기에 조성된 거로 추정되는 경주 탑동 3호 무덤에서 나온 이 토기의 백미는 역시나 역대급으로 불러도 좋을 '미소'입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절로 미소 짓기 만드는 이 귀엽고 앙증맞은 동물 모양 토기가 무려 1,400년 전 신라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환하게 웃는 표정이 생생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이 토기를 보는 순간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얼굴무늬 수막새를 대번에 떠올렸답니다. 그에 못지않은 매력적인 웃음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토기 역시도 또 다른 '신라의 미소'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길이 16.9cm, 높이 8cm의 이 토기가 무덤 안에서 1,400년 동안 고이 잠들어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박물관에 전시될 줄 옛사람들은 짐작이나 했을까요.
■집 모양 토기에서 만난 '톰과 제리'
톰과 제리라는 추억의 만화 기억하시나요? 멍청한 고양이 톰은 재치있고 약삭빠른 쥐 제리에게 매번 골탕을 먹습니다. 약자와 강자의 처지를 뒤바꾼 설정으로 짜릿하고 통쾌한 웃음을 선물해준 톰과 제리. 그런데 옛사람이 만든 토기에 만화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면?
집 모양 토기입니다. 사진은 앞에서 본 장면인데요. 양쪽으로 경사면을 이룬 지붕이 보이고, 그 아래로 대공과 들보, 기둥까지 제법 집의 꼴을 번듯하게 갖췄죠. 대구 현풍 지역에서 출토된 거로 전해질 뿐 정확하게 언젯적 무덤에서 나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높이가 12.5cm로 아담한 크기인데, 놀라운 건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저 동물입니다.
고양이로군요. 용마루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죠. 왜 저런 경계 자세를 하고 있을까 하고 봤더니, 역시나 이유가 있었더군요.
사진으로는 잘 식별이 안 됩니다만, 집의 정면을 바라보는 이 사진을 보면 위층 또는 다락방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거든요. 그 사다리를 자세히 보면 불청객들이 있습니다. 고양이가 잔뜩 노리는 불청객은 대체 누구?
쥐 두 마리가 열심히(?) 사다리를 기어오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이 토기를 보고 왜 톰과 제리를 번뜩 떠올렸는지 아시겠죠? 옛 장인은 그냥 집만 빚어놓은 게 아니라 여기에 깨알같이 고양이와 쥐를 만들어 붙였습니다. 그 덕분에 그냥 집 모양일 뿐인 다른 토기와 달리 더 자세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죠.
물론 무덤 안에 묻어준 것이니 이렇게 사람들 앞에 버젓이 선보이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을 테지만요. 아니, 반대로 무덤에서 나와 우리가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옛 사람의 어떤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흙으로 빚어서 무덤 안에 함께 묻어준 그 마음, 먼저 떠난 이에게 고양이도 있고 쥐도 있는 집을 선물해주는 그 살뜰한 마음을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깊은 감동과 여운을 주는 '신라의 피에타'
전시장을 길게 돌아 막바지에 이르면 이번 전시의 백미라 해도 좋을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천으로 얼굴을 덮은 주검 앞에 한 여인이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깊은 슬픔에 잠긴 존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 겁니다. 전시장에서 실제로 보면 어른 손가락 두 마디가 채 안 되는 이 작은 토우에 신라의 장인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순간을 더없이 극적으로 빚어 넣었습니다.
전시 기획자는 이 감동적인 토우를 보면서 미켈란젤로의 저 유명한 조각상 '피에타'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은 성모 마리아.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성(聖)과 속(俗)이 엇갈리는 복잡한 내면을 더없이 처연하고도 아름답게 빚어낸 천상의 예술. 그래서 전시 기획자는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토우에 '신라의 피에타'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나태주 시인의 유명한 시구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만든 것들을 우리는 유물이라는 이름으로 박물관에서 만납니다. 그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오래 보다 보면 그걸 만든 옛 사람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죠. 우리가 애써 옛 사람들이 남긴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나누는 까닭입니다.
유물은 과거와 현재를, 옛 사람과 나를 연결합니다. 흙으로 빚은 토기 속의 얼굴들. 그들의 환한 미소가 가만히 말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전시장을 나오면서 마주친 저 두 분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요?
■전시 정보
제목: 특별전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기간: 2023년 10월 9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품: 국보, 보물 등 토기 33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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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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