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 대작 거래 없었지만...‘그들만의 리그’ 뛰어 넘었다
中 큰손·영리치 등 8만여명 관람객 몰려
해외 미술계 인사 방한러시 ‘亞허브’ 입증
미술의 대중화 위한 외연확장 場 탈바꿈
“5일 동안 키아프리즈에 몰린 인파만 놓고 보면 미술 시장의 불황은 없다.”
지난 10일 폐막 앞두고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에서 만난 국내 유서 깊은 한 화랑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6일 막을 올린 후 5일간 이어진 ‘키아프-프리즈(FRIZE) 서울’은 ‘미술의 대중화’를 보여준 현장이었다. 까다롭고 수준 높은 전통의 컬렉터부터 미술과 친해진 ‘영리치’ MZ(밀레니얼+Z) 세대, 미래의 거장을 꿈꾸는 미술학도까지 대거 몰려들었다.
12일 키아프-프리즈 서울에 따르면, 닷새 동안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이번 아트페어엔 VIP와 일반 관람객 등 총 8만여 명이 방문했다. 누적 방문 기록을 제외한 실제 방문객으로, 전년 대비 15% 가량 증가한 수치다.
단군 이래 최대 ‘미술 장터’로 꼽히는 ‘키아프리즈’를 통해 확인한 점은 미술 시장이 전통의 부호들이 누리는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단지 미술품 거래를 위해 아트페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쉽게 만나지 못하는 명작을 감상하러 오는 등 문화 경험을 위한 ‘확장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대기를 위한 대기줄까지...샤갈 나온 부스 “입장에만 1시간”=뜨거운 열기는 현장 곳곳에서 확인됐다. 평일 오후 1시에 VIP를 대상으로 개막한 ‘키아프리즈’는 주말 동안 ‘최대 호황’을 누렸다. 프리즈의 폐막일인 지난 9일은 마음 편히 이곳을 찾은 직장인과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세계의 명화들이 총출동한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은 특히 인기가 높았다. 피카소, 에곤 실레, 마티스, 세잔의 소품들을 들고 온 스테판 옹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스테판 옹핀 관계자는 “입장 대기줄은 물론 대기줄에 서기 위한 대기 인원까지 발생해 기다리는 데에만 40~50분 정도가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제프 쿤스의 ‘게이징 볼’을 입구에 설치한 로빌란트 보에나(R+V)도 인기 갤러리였다. 28억원에 달하는 마르크 샤갈 작품을 가지고 나온 로빌란트 보에나는 개막 첫 날부터 관람객이 끊이지 않더니 폐막 날에는 급기야 1시간 이상 걸리는 대기줄이 만들어졌다. 너무 많은 인파 때문에 결국 VIP 입장객만 ‘프리 패스’하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로빌란트 보에나의 마르코 보에나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 등을 통해 주목할 만한 판매 기록을 달성했다”며 “프리즈 서울은 활기찬 분위기로 가득하며, 수많은 새로운 컬렉터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다”고 귀띔했다.
물론 체급차는 여전했다. 관람객을 쓸어모은 세계 2대 아트페어 프리즈에 비한다면 키아프는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키아프 내에서도 온도차가 컸다. 관람객의 입장이 시작되는 A홀엔 ‘쏠림 현상’이 컸다. A홀에 자리 잡은 갤러리 관계자들 역시 관람객 홍수에 분주했으나, B~C홀은 당혹스러울 만큼 한산했다.
키아프에서 만난 국내 갤러리 관계자는 “해외 갤러리들이 팬데믹 기간동안 많이 문을 열어 국내 갤러리들이 위축된 면도 없지 않다”며 “게다가 프리즈와 공동 개최를 하면서 부스 비용이 올라 부담되는 측면도 있었는데 오가는 관람객이 늘어 우리 화랑과 작가를 알린다는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고가는 구사마 야요이 호박 그림 77억원=수 백억원 대에 달하는 대작은 없었다. 1일차 ‘100억 매출’, 오픈런 등 역동적인 시장의 흐름을 나타내는 현상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키아프리즈’는 전 세계 해외 컬렉터와 ‘영리치’, 중국인 컬렉터들이 대거 등장해 다양한 가격대의 작품이 판매됐다. 작품 옆에 판매를 알리는 ‘붉은 딱지’가 붙은 갤러리도 일정이 지날수록 점차 늘었다.
타데우스 로팍의 설립자인 타테우스 로팍은 “프리즈 서울이 작년에 비해 한 단계 더 성장한 모습을 보니 매우 흥미롭다”며 “올해 아시아 전역에서 더욱 많은 컬렉터들이 발걸음을 했고 한국 관람객들도 늘었다. 작년과 비교해 올해는 페어를 시작한 지 단 몇 시간 만에 더욱 많은 판매량을 기록할 정도로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고 말했다.
최고가 매출은 ‘데이비드 즈워너’에서 나왔다. 데이비드 즈워너는 첫 날 77억원에 달하는 구사마 야요이의 ‘붉은 신의 호박’을 팔며 최고 성적을 냈고, 마마 앤더슨, 캐서린 번하드, 로즈 와일리의 작품을 25만 달러~55만 달러에 팔았다.
지난해 100억 매출을 달성한 하우저앤워스는 첫날에만 13점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니콜라스 파티의 회화를 16억7000만원에, 라시드 존슨을 13억원에, 조지 콘도를 10억 6000만원에 팔았다. 페이스갤러리는 알렉산더 칼더의 1965년작 조각 작품은 물론 조엘 샤피로, 로버트 나바, 키키 스미스,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을 판매했다.
타테우스 로팍은 다니엘 리히터의 2023년 신작을 37만5000유로(약 5억 3600만원)에, 리슨 갤러리는 스탠리 휘트니 작품을 55만 달러(약 7억3447만원)에 팔았다. 국제갤러리에선 하종현의 ‘접합’ 연작을 9~11억원에, 박서보 작품을 6억 5000만원에 판매했다.
키아프에서도 작품 판매 성과가 줄줄이 나왔다. 라이언 갠더의 단독 부스를 꾸미며 포르쉐를 가지고 들어온 갤러리현대는 그의 작품 3점을 모두 1억원대에 팔았고, 우고 론디노네 단독 부스를 마련한 국제갤러리도 그의 신작 회화를 3억원에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우고 론디노네의 매티턱 연작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화 작품이 모두 팔렸다.
이번 키아프에서 주목할 점은 ‘젊은 작가’, ‘신진 작가’, ‘소품’의 반란이다. 엘케이아이에프갤러리는 페어 시작과 함께 완판을 기록했고, 신진 갤러리 옵스큐라는 VIP 오프닝 당일 배병우 작가의 작품이 약 2억원 가량 판매됐다. 갤러리 BHAK에서도 보 킴, 순재 작가의 작품이 나갔고, 갤러리 이길이구가 선보인 1991년생 작가 권하나의 300만원짜리 작품 10개를 모두 팔았다.
올해로 5년째 키아프에 참가하는 피그먼트 갤러리는 부스는 작았지만 인기가 많다. 한국에 갤러리를 열진 않았지만, 키아프에서 갤러리 최고 매출을 기록한 곳이기도 하다. 피그먼트 갤러리 관계자는 “올해는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 소품 위주로 들고 나오는 전략을 세웠는데 작년의 80% 가량의 매출을 내며 선방했다”고 귀띔했다. 이 갤러리는 아기자기한 그림을 좋아하는 MZ세대를 겨냥, 100만원 중반대의 그림부터 1000만원 대를 호가하는 작가의 작품이 줄줄이 팔려나갔다.
▶서울 ‘아시아 허브’ 입증...작품 다양성·효율적 운영은 숙제=키아프리즈의 ‘두 번째 동행’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 미술시장의 저력과 가능성을 확인한 점이다. ‘키아프리즈’를 찾은 갤러리 관계자들은 해가 다르게 성장하는 한국 미술시장을 높이 평가했다.
백남준의 ‘부처’를 들고 서울을 찾은 가고시안의 닉 시무노비치 아시아 시니어 디렉터는 “한국 컬렉터들은 대단히 높은 식견을 갖고 있으며 서울의 미술계는 분명 성장하고 있다”며 “서울의 문화 생태계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의 준준 차이 디렉터는 “프리즈를 통해 세계 현대미술 담론의 주축으로 자리잡은 한국의 수도 서울의 역동적인 예술 문화계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아쉬움이 없진 않다. 첫해보단 나아졌으나 두 페어의 동행은 여전한 체급차를 드러냈다. 프리즈에 나온 작품과 전시는 지난해의 화려함엔 미치지 못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현장을 찾은 한 컬렉터는 “프리즈는 마스터스 섹션 일부를 제외하곤 현대미술 작가들이 주를 이뤘다. 이렇게 많은 해외 현대작가 작품만 쏟아낼 거라면, 차라리 국내 거장의 단독 부스를 내세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갤러리 대표는 “이번 프리즈는 지난해에 비해 작품의 질이 다소 떨어지는 면이 있다”며 “하지만 익숙한 작가의 작품들이 나와 기존 주요 컬렉터가 아닌 전시 관람차원에서 온 관람객에겐 색다른 문화 체험의 시간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키아프리즈’ 동안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MoMA), 영국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과 일본의 모리 미술관, 홍콩의 엠플러스(M+) 미술관 등 해외 미술계 인사들이 대거 방한, 한국 미술의 현재를 전 세계로 알리는 장이 됐다
패트릭 리 프리즈 서울 디렉터는 “서울은 수준 높은 눈을 가진 컬렉터와 정부의 지원, 공공미술관과 학교, 비영리단체 등이 유기적으로 합쳐져 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며 “풍요롭고 대단한 힘을 가진 한국의 아트 신(art scene)을 전 세계 큐레이터들이 들여다보고 있다. 아시아에서 서울의 아트 시장은 인프라는 물론 시장의 측면에서도 이미 허브로서 증명됐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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