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장관이 나서도 해군이 ‘홍범도함’ 이름 안 바꾸는 이유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원 이력을 이유로 육군사관학교 내 홍 장군 흉상 이전을 결정하자,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달 3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군함을 상징하는 이름을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으로 하는 것은 적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수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도 지난 4일 국회 답변에서 “홍범도함 명칭에 대해서는 (변경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이 홍범도함 이름 변경을 언급하는데도 지난 11일 해군 관계자는 국방부 정례 브리핑에서 “현재 해군이 홍범도함 함명 변경 관련해서 검토하고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지난달 25일 홍범도함 함명 변경 논란이 불거진 뒤 해군은 이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역대 해군참모총장 10여명이 참석한 지난 9일 정책자문회의에서 몇몇 총장은 홍범도함 함명 변경 움직임에 반대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은 “무형 전력이 유형 전력 만큼이나 중요한데, 군함에 있어서는 그 명칭이 무형 전력의 하나다”라며 “해군의 문화와 정체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은 군함은 무기의 하나로 보지만 해군은 문화와 정체성으로 여긴다. 군함은 육군 탱크나 공군 전투기처럼 하나의 무기체계이면서 승조원들의 생활공간이다. 출항하면 장기간 배에서 생활하는 해군에게 군함은 무기이자 집이자 일터다. 군함은 해군에게 존재의 근거다.
해군은 군함을 단순한 기계가 아닌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여긴다. 군함 진수식은 함정의 이름을 부여하고 포도주를 함수에 부은 다음 진수선을 절단함으로써 함정을 물 위에 띄우는 순으로 진행한다. 진수선은 해군이 정하는 귀빈의 부인이 도끼를 사용하여 절단한다. 이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대모를 지정하던 종교의식의 연장이며, 진수선을 자르는 것은 탯줄을 자르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해군이 배가 물에 처음 들어가는 진수식을 하면서 군함의 이름을 선포하는 명명식을 같이 하는 것은 신생아가 태어나고 부모가 고심 끝에 작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계 해군의 표준을 만든 영국 해군은 군함 이름이 사람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름이 바뀌면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어 한번 정한 군함 이름을 바꾸지 않는 원칙을 갖고 있다.
군함의 이름 짓기는 해군 고유의 권한이다. 군함 이름은 해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아 확정된다. 이후 군함 진수 한 달 전에 함정의 이름과 번호가 포함된 명명장이 해군 전력기획참모부장 주관하에 시달되며, 진수식에서 해군참모총장이 명명하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다.
군함 이름 짓기에는 엄격하고 체계적인 기준과 절차가 있다. 구축함에는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는 왕이나 장수 같은 역사적 인물, 호국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민족 간의 전투에서 공훈이 있는 장수는 배제한다. 김유신이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삼국통일’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군함 이름으로 쓰이지 않은 배경이다.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과 연관된 의혹이 있다”는 국방부 입장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라면, 함명 검토 과정에서 ‘홍범도함’이란 이름은 탈락했을 것이다.
홍범도함은 1800톤 손원일급 잠수함 중 7번째로 만든 잠수함이다. 손원일급 잠수함은 3번함 안중근함부터는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의 이름을 붙여, 김좌진함(4번함). 윤봉길함(5번함), 유관순함(6번함), 홍범도함(7번함), 이범석함(8번함), 신돌석함(9번함) 등이 있다.
함명을 둘러싼 사연이 많다. 해군은 2005년 7월 수송함(1만4천t) 이름을 독도함으로 정했다. 독도 수호 의지와 섬처럼 영원히 침몰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상호 민감한 문제에 대해 자극을 피하자는 양국의 이해를 무시했다”며 유감을 표시했지만 한국 정부는 “영토 주권에 대한 심대한 침해 행위”라고 무시했다.
2007년 5월 진수된 한국형 이지스구축함(KDX-Ⅲ) 1번함 이름은 세종대왕함이다. 애초 해군은 조선 숙종 때 일본의 울릉도와 독도 침략을 막아낸 어부 안용복을 함명으로 검토했다. 하지만 막판 검토 과정에서 일본을 지나치게 자극할 것을 우려해 세종대왕함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군함 이름에 주변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군함의 상징성 때문이다. 국제법은 군함을 국토의 일부로 인정한다. 군함이 외국 항구에 입항하면 일반 상선과 달리 치외법권을 누린다.
해군에게 존재의 근거이자 정체성인 군함 이름을 외부에서 뚜렷한 명분이나 합리적 이유없이 느닷없이 바꾸자고 하면, 난폭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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