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가족이 먼저다
회사가 부도가 나 회생이 어렵다고 판단해 경영권을 넘기고 나서 아버지는 심한 화병을 앓았다. 믿었던 부하 직원의 배신에 몸서리쳤다. 분노나 답답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억지로 꾹 눌러 담았다가, 그 화가 삭아 비틀어져서 생긴 심화병(心火病)이다. 지나칠 정도로 화를 잘 내는 다혈질 성격 때문에 가족들이 가까이 가질 않았다. 언제나 독상(獨床)을 받아 혼자 드셨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다. 가끔 내가 겸상을 해도 많이 불편했다. 아버지는 약도 별로 없는 울화병(鬱火病)을 겪어냈다. 밤새 불이 켜진 아버지의 방, 불면의 밤을 지켜보는 가족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근무하는 남동생이 TV와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사 보냈다. 다른 가족들도 좋아했지만, 특히 어머니가 무척이나 기뻐했다. 오랜만에 두레반에서 저녁밥을 먹을 때 어머니가 “냉장고에 넣은 김치가 참 맛있다. 냉장고가 커서 좋다”고 몇 번이나 말씀했다. 그때 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건넌방으로 가서 나를 불렀다. 불길이 안 들어가 냉골이라고 투덜거린 게 기억났던지 방을 치우라고 했다. 온 방에 불을 켜고 밥 먹던 가족들을 불러 건넌방 구들장을 뜯어내고 새로 깔았다. 시멘트로 방바닥 마무리를 끝냈을 땐 이미 밤이 이슥해서였다.
이튿날 새벽부터 집 고치는 크고 작은 공사는 계속됐다. 안방으로 물이 새는 지붕에는 내가 올라가 기와를 갈아 끼웠다. 모든 창문은 대패로 깎아내 부드럽게 열리게 고쳤고, 깨진 계단은 모두 수리했다. 집을 새로 짓는 것처럼 대대적인 집안 수리공사는 한 달이나 계속됐다. 손 안 본 데가 없을 정도로 수리를 마친 아버지는 느닷없이 마루방에 걸려있던 액자를 떼어내라고 했다. 며칠 걸려 연습하던 아버지가 가훈(家訓)을 새로 썼다. 표구해 건 새 가훈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아버지는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설명을 이어갔다. ‘화(和)’는 ‘벼(禾)’와 ‘입(口)’을 합친 말이다. 벼는 밥이 되는 곡식이고, 입은 음식을 먹는 몸 일부이니, 결국 ‘밥을 먹는다’라는 뜻과 같다. 더 나아가 가화(家和)는 집안 식구가 모두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이 되고, 결국 ‘가족 모두가 함께 밥을 먹을 정도로 잘 어울린다면, 안 풀릴 일이 없다’라는 뜻이 된다. 아버지는 “우리네 선조들이 사람들 삶 속의 절실하고 진실한 문제가 어디부터 시작되고 어떻게 풀리는지 잘 통찰한 교훈이다”라고 평가했다. 이 성어는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온다. 맹자가 공손추에게 가르친 내용이다. 원문은 “자식이 효도하면 어버이가 즐겁고, 집안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 때때로 불이 나는 것을 방비하고 밤마다 도둑이 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 時時防火發 夜夜備賊來]”이다.
아버지는 맹자가 가족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 말이라며 “가족이 화목하면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협력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가족의 화목은 가족 구성원들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드높이며,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크게 도움 된다. 내가 그걸 잠시 잊고 회사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회한을 섞어 말씀했다. 떼낸 가훈은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다. ‘정신을 한 곳에 기울이면, 어떤 일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와 그의 문인들의 문답을 채집한 책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말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오랜 기간 집안에 들어서면 걸려있었다. 이어 아버지는 “가훈은 가족이 지킬 가치와 윤리를 담았다. 가족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행동 규범이 될뿐더러 정체성을 지니게 돼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의미를 부여하며 시대가 바뀌어도 필요하다고 했다.
집수리가 끝나고 가훈이 바뀐 뒤 아버지 속병은 씻은 듯이 나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성가셔하던 식용유 찌꺼기가 흘러내리지 않는 병마개를 발명해낸 게 그때다. 아버지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4연(緣)이 있다.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직연(職緣)이 그것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당연히 직연, 학연, 지연, 혈연 순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직장이 끊어지면 그 반대다. 혈연이 우선이고 가족이 먼저다”라며 “식구는 사랑하고 지원하고 지지하며 어려움을 겪을 때 지켜주고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 특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안도감을 준다”며 가족 사랑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가족애(家族愛)는 일찍 깨우치게 해 서둘러 손주에게 물려줄 소중한 덕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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