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년 정지영 "난 대중영화감독…관객이 버릴 때까지 할 것"
"지금 영화계는 각자도생의 시대, 눈앞의 이익에만 집중…안타깝다"
(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지영(77) 감독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창작에 대한 열정이 여전히 뜨겁다. 영화인들이 그를 청년에 비유하는 이유다.
올해 안으로 신작 '소년들'을 개봉할 예정인 그는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차기작도 준비 중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 감독을 11일 서울 동작구의 독립예술영화관 아트나인에서 만났다. 이곳에선 정 감독의 데뷔 40주년을 맞아 그의 영화 세계를 조명하는 회고전이 지난 6일부터 열리고 있다.
그는 회고전 개막식에서 "장담하건대 앞으로 4년은 더 할 수 있다"고 말했고, 그 자리에 있던 영화인들은 "앞으로 40년은 더 해달라"고 화답했다.
그는 이날 기자와 만나서도 "관객들이 날 버릴 때까지 영화를 계속할 것"이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영화인들이 정 감독을 아끼는 건 그가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해온 보기 드문 사회파 감독이란 점과도 무관치 않다. 그는 스크린쿼터제와 같은 영화계 현안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1983년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정 감독은 '소년들'까지 포함해 모두 17편을 연출했다.
6·25 전쟁 당시 빨치산을 다룬 영화 '남부군'(1990), 베트남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하얀 전쟁'(1992), 사법 체계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담은 '부러진 화살'(2012),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이 당한 고문을 다룬 '남영동 1985'(2012), 금융자본주의의 문제를 파헤친 '블랙머니'(2019) 등 사회성 짙은 작품이 많다. 다큐멘터리 '영화판'(2011)에선 한국 영화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하기도 했다.
정 감독은 이런 영화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남들이 안 하는 걸 할 뿐"이라며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르를 죽 나열하면 액션, 멜로, 코미디 등이 나오고 사회 드라마는 7∼8위쯤 될 텐데 난 앞부분에 나열된 걸 잘할 재주가 없다"며 웃었다.
그는 "난 영화를 아주 어렵게 만드는 감독들 가운데 한 명"이라며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장르를 선택하고, 대중과 호흡하는 영화를 만들려니 얼마나 힘들겠나"라고 털어놨다.
1980년대에 데뷔한 감독들 가운데 지금도 활동 중인 사람은 정 감독 외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내가 운이 좋은 것"이라며 "그들(노장 감독들)도 항상 작품을 준비하고 있지만, 투자자 등이 젊은 사람들이다 보니 나이 든 감독들과 만나는 걸 불편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이 노장 감독들의 작품 세계를 쉽게 '낡았다'고 치부하면서 이들에게 기회가 안 돌아간다는 것이다.
정 감독은 자신이 예술영화가 아닌 대중영화 감독이란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사회 문제에 천착해온 영국의 켄 로치 감독에 비견되는 데 대해서도 "켄 로치 감독은 극적 장치를 동원하지 않는다. 진솔하고 진지하게 접근한다"며 "난 (재미를 위해) 극적 장치를 동원한다. 그래서 난 대중영화 감독이고 그는 예술가인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내는 것도 대중영화 감독을 표방하는 정 감독이 중시하는 덕목이다.
그는 '블랙머니'를 연출할 때 경제를 모르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복잡한 사건을 헤쳐가도록 함으로써 관객들이 그를 통해 사건의 실체에 쉽게 다가가게 했다고 설명했다.
정 감독의 신작 '소년들'은 전작들보다도 대중적이다. 배우 설경구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삼례 나라슈퍼 사건'으로 불리는 실화를 토대로 했다.
1999년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한 슈퍼에서 노인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죄 없는 청소년 세 명이 부실한 수사로 범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복역했다가 진범들이 잡히면서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 감독은 이 영화가 공권력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며 "공권력이 그들(죄 없는 청소년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해 범인으로 만들어 감옥에 보냈다.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고 털어놨다.
이 영화에서 설경구는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수사반장을 연기했다. 정 감독은 "상당히 재미있는 캐릭터"라며 궁금증을 일으켰다.
'소년들'은 올해 초 로테르담영화제에서 공개돼 호평받았다. 이 영화는 다음 달 18일 영국에서 개막하는 런던아시아영화제의 정 감독 데뷔 40주년 회고전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정 감독은 "조금 쑥스럽고, '회고전을 할 만한 게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웃었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정 감독의 차기작은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하고 캐스팅을 진행 중이다. 시나리오는 제주 4·3평화재단의 공모전 당선작을 토대로 했다.
정 감독은 "4·3의 아픔과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관한 이야기"라며 "많은 관객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영화의 위기에 관한 질문엔 영화계에 대한 쓴소리가 나왔다.
정 감독은 "몇 사람에게 의존하는 그런 영화계가 돼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영화계 전체의 인프라가 무너지면 그 몇 사람마저 나올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옛날엔 영화인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줄 알았지만, 지금은 각자도생의 시대인 것 같아 안타깝다"고도 했다. 영화계 현안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공동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이어 "자기 이익이냐 아니냐에 집중하는 게 아닌가 한다"며 "한국 영화의 큰 미래를 바라보며 가는 게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이익에 좌우되고 있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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