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휴식의 완성, 횡성
(시사저널=글 남혜림·사진 신규철)
호수 곁을 걷고, 루지를 탄 채 도로를 내달렸다. 강원도 횡성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쉬었다.
호흡이 긴 마라톤에서는 속도를 조절해 결승점까지 갈 힘을 남겨 둔다. 달력의 절반 이상이 넘어간 지금, 삶에도 '천천히' 구간이 필요하다.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 횡성을 찾은 이유다. 횡성은 섬강이 흐르는 서쪽을 제외하면 주변이 온통 산이다. 다른 말로는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자연의 품 안이라는 뜻이다. 마침 입추라는 계절의 문턱을 지나 선선하고, 더위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시원한 바람도 불어온다. 이맘때 횡성은 휴식을 즐기기에 더없이 알맞다.
쉼의 정석, 횡성호수길
머릿속이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해질 때 하염없이 걷는 상상을 한다. 걷는 일에 집중하면 잡념이 사라지고, 문득 마주친 고운 풍경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주기 때문이다. 횡성호수길 5코스 가족길에서 상상을 현실로 옮긴다. 횡성호수길은 여섯 개 코스를 모두 합쳐 31.5킬로미터에 달하는데, 9킬로미터를 차지하는 5코스는 특히 횡성호 가까이에 조성해 자연이 자세히 들여다보인다. 게다가 길이 험하지 않아 무리 없이 완주한다. 각각 4.5킬로미터인 A코스와 B코스를 천천히 거닐기로 하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는다.
두 코스는 숫자 8 모양으로 서로 이어져 출발점과 도착점이 같다. "한 방향 코스이니 길 잃을 염려가 없습니다. 그래도 걱정이라는 분에게는 이렇게 말씀드려요. 내 왼쪽에 호수가 있다면 맞는 길입니다. 절대 오른편에 호수를 두지 마세요!" 윤병철 문화관광해설사의 유용한 설명을 새기며 횡성호수길 탐방에 나선다. A코스의 시작점인 코뚜레 게이트를 지나 자박자박 흙길을 밟는다. 이른 오전임에도 길 위에 여행자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었다. 주인의 발걸음을 따라 종종거리느라 열심인 강아지도 눈에 띈다. 반려동물도 입장 가능하다니, 가족이라는 다정한 단어를 5코스에 붙인 이유를 알 것 같다. 오래지 않아 갈림길이 나타나고 '장터 가는 가족'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작품은 진행 방향 반대쪽에 자리하는데, 마치 물속으로 향하는 듯하다. 그들이 길 뒤편에 위치한 사연은 호수 아래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 횡성 갑천면에 댐을 만들기 위해 첫 삽을 뜬다. 횡성읍에서부터 흐르는 남한강의 지류, 섬강을 막아 농업용수 공급과 홍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이었다. 댐은 무려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완성된다. 한 가지 서글픈 점은 횡성댐이 들어서 그 자리에 존재하던 다섯 개 마을이 수몰되었다는 것. 먹고 자던 집이, 매일같이 들락거리던 학교가, 누군가의 고향이 물 아래 고요히 잠겼다. 5코스 매표소 근방에 '망향의 동산'이 세워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터전을 잃은 이들을 위해 그곳에 놓였던 중금삼층석탑, 화성정 등을 뭍으로 옮겼다. 아련한 마음을 달래듯 매년 10월에 이곳에서 망향제가 열린다. 고향을 마음껏 그리워하는 장소를 마련해 그들에게 작은 배려를 한 셈이다. 누군가의 기억을 품은 호수라는 사실이 먹먹하다.
일렁이는 기분을 안고 호수길 깊숙이 들어간다. 사람 형상의 나무 조형물을 설치한 포토 존에서 걸음을 멈춰 이 순간을 기록한다. B코스 진입을 알리는 원두막 쉼터가 나오자 한숨 돌린다. 여기서부터는 이전보다 한층 우거진 숲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은회색 나무껍질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은사시나무 군락지, 소나무 사이에 조성한 뱃머리 전망대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B코스의 매력은 구불구불한 길에서도 느껴진다. 인위적으로 산책로를 조성하지 않고 지형을 따라 길을 닦았기 때문이다. 볼록 나온 부분은 물과 가까워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히고, 안쪽으로 난 길에서는 숲속 풀벌레들의 합창이 들린다. 자연을 누비는 것이 이리도 달콤한 일이었던가. 횡성호가 건네는 소박한 선물에 미소가 지어진다.
폐도로의 변신, 횡성루지체험장
이번 목적지는 산속에 난 폐도로다. 인적이 끊긴 도로가 여행지로 거듭났다는 소식이 퍼져 근방이 사람으로 북적인다. 여느 여행지와 비슷하지만 방문자 대부분이 횡성 마스코트 '한우리'가 그려진 귀여운 헬멧을 쓴 게 특이하다. 그제야 '루지체험장'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바퀴를 단 썰매를 타고 트랙을 달리는 스포츠 루지를 실제 도로에서 경험하도록 한 것이다.
트랙으로 변신한 폐도로는 본래 국도 42호선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조선 시대부터 수도와 강릉을 이어 '관동옛길'이란 별명으로 불린 길목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관동옛길은 그만 쓰임을 잃는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근방에 터널이 생겨서다. 횡성은 방치된 도로를 현명하게 이용했다. 기존 도로와 산을 그대로 보존해 친환경 유원 시설을 조성한 것이다. 포장도로 일부를 활용해 2.4킬로미터 길이의 트랙으로 만들고 트릭 아트, 우주 터널 등 테마를 정해 구간을 나누었다. 노력 끝에 2020년, 횡성루지체험장이 개장한다. 루지를 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그 결과는 말로 듣지 않아도 알겠다.
전기 카트에 몸을 싣고 도로를 올라가 차례대로 썰매에 올라탄다. 한우리 헬멧을 착용하고, 운전법과 안전 교육을 귀 기울여 듣는다. 이제는 정말 달릴 시간. 침이 저절로 꿀꺽 넘어간다. 안전 요원의 신호에 따라 운전대를 힘껏 잡아당기자 썰매가 스르륵 움직이면서 서서히 속도가 붙는다. 한우리와 운전자, 썰매가 하나 되어 도로를 쏜살같이 내달린다. 짜릿한 쾌감에 웃음이 마구 터져 나오더니, 속도에 익숙해진 후 아예 콧노래를 부른다. 이 순간만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즐거운 시간은 왜 이리 짧게 느껴질까. 아쉬운 건 모두가 같다. 탑승자들은 루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하지만 2회권 표를 구매했다면 걱정 없다. 전기 카트를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 한 번 더 탑승할 수 있으니까. 전기 카트가 빨리 도착하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루지를 따라 아래에 다다른 건지 잔잔한 바람이 일순 머리카락을 흩트린다. 아마도 곧, 가을이 오려나 보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알바 구하던 10대 재수생의 비극…성폭행 피해 후 극단선택 - 시사저널
- “명품가방 사서” 부인 바다로 떠밀고 돌 던져 살해한 30대 남편 - 시사저널
- 호신술 배우러 간 수강생 성폭행한 주짓수 관장…징역 4년 - 시사저널
- “같이 죽자” 시속 97km 달리다 ‘쾅’…혼자 도망친 50대 남친 - 시사저널
- “이재명도 민망해 말고 잡수러 와”…단식장 옆에서 ‘회’ 파는 與 - 시사저널
- 집값은 주춤하는데 전세 값은 오른다 - 시사저널
- “의원님 공부 좀 하세요”…尹 “싸우라” 지시에 ‘투사’된 총리‧장관들 - 시사저널
- 외국女 106명 ‘연예인 비자’로 데려와 접대부 시킨 일당 - 시사저널
- “생활비 아껴 모았다”…5000만원 놓고 사라진 중년 여성 - 시사저널
- 힘들게 운동해도 그대로인 근육량…이유는? - 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