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붉은 색, 맵고 당도 높아… 미국·호주·유럽 등 해외서도 ‘엄지척’
“우와, 살짝 매우면서도 달짝지근한 맛….”
지난 8일 오후 경북 영양 읍내에서 차로 30분쯤 꼬불꼬불 산비탈 길을 지나 도착한 수비면 오기 마을. 해발 450m 골짜기마다 한 뙈기씩 고추밭이 펼쳐졌다. 농장주 황정인(46)·정주희(41) 부부가 선홍색 고추를 한 개씩 나눠주자 한입 베어 문 길손들이 “이게 진땡(진품)이지”라며 탄성을 질렀다.
이날 황씨 부부 농장 한 쪽에선 인부들이 헝겊으로 말린 홍고추를 반짝반짝 빛 날만큼 정성껏 닦고 있었다. ‘윙~윙~’ 기계음과 함께 고추 건조작업도 쉼 없이 이어졌다.
모두 서울 출신인 황씨 부부는 2018년 12월 영양으로 귀농한 6년차 농부다. 이들이 지난해 1만3200여㎡(약 4000평) 농장에서 수확한 건고추는 8000근. 대부분 서울 현지 지인 등을 통해 직거래로 이뤄진다고 한다. 인건비가 두 세배 더 들더라도 여러 차례 반복된 세척과 품질 좋은 고추만을 선별하기에 불량·변질 등 소비자들의 이의 제기는 단 1건도 없다고 한다.
황씨는 현재 마을 어르신들의 추천으로 영농회장을 맡고 있다. 부인 정씨도 ‘부녀회장’ 감투를 쓸 정도로 이들 부부는 고추 농사만큼은 정평이 날 정도로 ‘베테랑’이 됐다. 최근엔 ‘농부가 팜’이라는 온라인 판매처를 만들어 마을 어르신들이 수확한 고추도 대신 팔아 주고 있다.
처음부터 이들이 고추 전문가가 된 건 아니다. 황정인씨는 “농사를 흙장난쯤으로 보고 무작정 귀농부터 시작한 탓에 처음 1년은 거듭된 실패로 고생도 많이 했다”며 “마을 어르신들에게 틈틈이 배우고 끊임없이 공부한 끝에 고추농법을 터득했다”고 전했다. 부인 정주희씨는 “처음엔 힘들었지만 일한 만큼 결실을 가져다는 주는 고추농사 매력에 푹 빠져 산다”고 말했다.
2017년 5월 결혼한 황씨 부부는 차박(車泊)을 하며 전국을 돌던 중 영양고추 맛에 빠져 귀농을 결심했다고 한다. 여기에다 공기 좋고 빛 공해가 적어 별 잘 보이는 풍광도 이들이 영양에 정착하는데 한몫했다. 황씨 부부가 사는 수비면 일대는 대기 질이 좋아 2015년 아시아 최초로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됐다.
◇고추의 본향, 영양고추가 최고인 이유
경북 내륙의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는 영양군은 국내 최대 고추 산지다. 1만5700명 남짓한 영양군 인구 중 40%가 고추농사를 짓는다. 산지가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영양군은 고도가 높아 한여름에도 해가 떨어지면 쌀쌀할 정도로 일교차가 크고 연평균 강우량도 적어 고추 성장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이런 고추 생육에 필요한 조건이 딱 맞아 떨어져 자연스레 영양은 고추의 본향(本鄕)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영양고추의 가장 큰 특징은 선명한 붉은 빛이 돌고, 적당히 매우면서도 당도가 높아 전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하고 선호도도 높다는 점이다. 영양 고춧가루로 김장한 김치는 깊은 맛이 나면서도 붉은 색깔이 잘 변하지 않아 입과 눈을 동시에 호강하게 한다.
농촌진흥청 생활과학연구소에서 성분 분석 결과에도 영양고추는 당질과 비타민 등이 타 지역 고추에 비해 우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영양고추는 전국 농산물 전시회에서 대상을 여덟 차례나 차지했다. 전국 소비자들도 영양고추의 품질을 최고로 인정한 것이다.
현재 1989개 농가에서 영양고추의 전통을 잇고 있다. 작년 기준 고추 수확량은 3045t. 농가 전체 매출액은 558억원에 달할 정도로 이제 영양고추는 지역 먹거리로서 효자 작물이 됐다.
하지만 고추 농사는 담배 농사만큼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수확 과정만 보더라도 땡볕에서 수확해 세척·건조에 이어 포장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손길이 안 가는 곳이 없을 정도다.
1988년 3301ha(998만평)에 달했던 영양고추 재배면적은 작년 기준 1324ha(400만평)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농가 수가 줄어든 탓이다. 영양군 관계자는 “농사에 필요한 일손이 부족해 고추 재배 농가에선 해외 노동인력으로 많이 대체하고 있다”며 “다행히 최근 고추 농사를 짓기 위해 귀농하거나 문의하는 청년들이 늘면서 영양고추 미래에 청신호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호주·유럽 등 영양고추 해외서도 ‘엄지척’
고추 주산지답게 영양군에는 국내 유일의 영양고추연구소가 있다. 1995년 설립된 이곳에선 지난 2001년 지역 토종 고추인 ‘수비초’를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지역 명을 따 이름 붙여진 수비초는 1960년대 수비면 오기리에서 재배되는 고추 중에서 고추꼭지가 우산형이고 끝이 뾰족해 외관상 모양이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품종이다. 캡사이신 함량이 일반 고추보다 5배 높아 매운맛이 강하고 고추 특유의 단맛이 나 영양에서도 최고로 인정해 준다.
하지만 각종 병충해에 취약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적다보니 1970년대 이후 잡종 고추에 밀려 수비초를 재배하는 농가는 점차 줄었다. 영양고추연구소는 최근 지역 내 남아있는 수비초 12개 품종 중 품질이 가장 뛰어난 3개 품종을 복원했다. 현재 복원된 수비초 고유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병충해에 강한 품종으로 키우기 위한 ‘명품고추 특화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보다 앞서 설립된 영양고추유통공사에선 수매한 홍고추로 가공 상품을 만들고 있다. 고추 건조처리공장과 분쇄공장·저온저장고 등이 갖춰진 이곳에선 홍고추로 만든 고춧가루인 ‘빛깔찬 고춧가루’를 2006년 첫 출시했다. 한국식품연구원이 분석한 결과, 빛깔찬 고춧가루는 신맛이 적고 과일에 들어 있는 포도당 종류인 ‘유리당’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잔류농약·곰팡이균·쇳가루 등에 대한 검증에서도 국내 최고 품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양고추는 미국·중국·일본·호주·유럽 등 해외에도 수출되고 있다. 지난달 25일에는 미국에 올해산 빛깔찬 고춧가루 13t이 수출됐다.
◇‘언제나 옳고 정직한 맛’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
영양군이 영양고추로 서울광장을 붉은색 매운맛으로 물들인다. 영양군은 ‘2023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 행사를 오는 18일부터 3일간 서울광장에서 연다고 11일 밝혔다.
올해 15회째를 맞은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은 2007년 고추라는 단일테마로 전국 최초로 영양군이 서울 소비자를 직접 찾아가는 행사로 기획했다. 오랜 기간 영양고추의 명성을 전한 덕분에 이젠 서울시민들이 기다리는 축제가 됐다. 지난해엔 관람객 8만여 명이 찾을 정도로 영양군 대표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행사에는 ‘영양고추는 언제나 옳다’는 슬로건으로 엄격한 기준으로 선정된 영양군 60여 고추재배 농가와 영양고추유통공사, 영양농협, 남영양농협 등 우수 고춧가루 가공업체가 참여해 영양고추와 가공품을 선보인다. 현장에는 농특산물 전시판매부스·홍보전시관·영양고추 테마동산 등 볼거리와 먹거리가 준비될 예정이다. 김치와 영양고추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쇼와 레크리에이션 등 관람객 참여 행사도 준비해 영양고추 판매를 촉진할 방침이다.
오도창 군수는 “영양고추 축제를 통해 군민들이 옳고 정직한 마음으로 재배한 명품 영양고추로 풍요로운 가을이 되길 바란다”며 “영양고추의 우수성을 수도권 소비자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도록 남은 기간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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