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보스톤' 잘 달렸는데…캐스팅이 허들 [영화 리뷰+]
광복 이후, 해방을 맞이한 기쁨도 잠시 미군정이 시작됐다. 독립된 정부도 없었고, 사람들은 먹고살기 바빴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선 사람"이라는 뜨거운 감정을 불어 넣었던 민족의 영웅들이 있었다. 영화 '1947 보스톤'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2021년 제23회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설립된 일본올림픽박물관에 손기성 선생이 전시돼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손기정 선생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한 인물. 조국이 강제로 점령된 상태에서 올림픽에 출전했기 때문에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던 그가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월계수 묘목으로 일장기를 가린 사진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이 사건으로 손기정 선생은 마라톤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육상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1947 보스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손기정 선생의 그 이후의 인생에 주목했다. 광복된 이후에도 지독한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손기정 선생은 "우리 애들이 태극기를 달고 달려봐야 하지 않겠냐"는 남승룡 선생의 말에 다시 육상에 발을 내디딘다. 남승룡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 당시 3위를 했던 인물. "3위를 한 것보다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화분이 더 부러웠다"는 말로 나라 잃은 설움을 전했던 분이다. '1947 보스톤'에서 손기정 선생에는 하정우, 남승룡 선생에는 배성우가 각각 캐스팅됐다.
태극기를 달고 달리지 못한 한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됐다 다시 개최되는 1948년 런던 올림픽은 꿈의 무대였다. 하지만 한국은 국제 대회 참가 기록이 없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다. 직전에 있었던 베를린 올림픽의 금메달과 동메달 수상자를 배출했음에도 그 기록이 '일본'으로 귀속됐기 때문. 런던 올림픽 참가를 위해, 한국이라는 독립된 나라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처음 출전한 대회가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였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유망주를 찾던 중 이들의 눈에 포착된 인물이 서윤복 선수였다. 타고난 체력과 다부진 체구, 여기에 악과 깡으로 각종 대회를 휩쓸던 서윤복 선수는 "달리는 것보다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어릴 적 영웅이었던 손기정의 제안을 받고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1947 보스톤'은 민족의 영웅들을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유쾌함을 잊지 않는 미덕으로 그려냈다. 실제 사건, 실제 인물을 영화로 했다는 점에서 '역사가 스포(일러)'라 할 만하지만, 서윤복 선수가 결승전을 앞두고 위기를 겪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실제로 마라톤을 뛰는 것과 같은 긴장감과 심장의 떨림을 선사한다.
특히 난민국이라는 이유로, 미군정이 있다는 이유로 태극기를 가슴에 다는 것도 어려웠던 그때 그 시기에, 말도 통하지 않았던 이국땅에서 고군분투했던 이들의 모습은 뭉클함을 안긴다. "한국은 어디에 있냐", "일본어를 쓰냐, 중국어를 쓰냐" 등 무례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진심을 호소하는 모습은 "국뽕"이라고, "감정과잉"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데도 여운을 안기는 장면이다.
'은행나무 침대'부터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한국의 블록버스터와 캐릭터 영화의 장을 열었던 강제규 감독은 마라톤 영웅들 각각의 서사를 촘촘하고 탄탄하게 쌓아 올렸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볼만하다. 특히 서윤복 선수 역의 임시완은 "체지방 5%를 만들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완벽한 마라토너의 몸과 폼으로 극의 몰입도를 끌어 올린다.
그런데도 찜찜함을 남기는 요소는 역시 배우다. 논란을 일으킨 배우가 자숙 기간을 갖고 복귀하는 수순은 이미 여러 번 반복돼 익숙하지만, 논란의 인물이 역사의 영웅을 연기하는 건 다른 일이다. 특히 배성우가 연기한 남승룡 선생은 까칠하고, 자기 주관이 강한 손기정 선생을 대신해 육상 선수들을 보듬고 챙기는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에 넘치는 열정으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선수로 출전하기까지 한다.
강제규 감독은 앞서 진행된 제작발표회에서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고, 이 분들의 삶과 업적이 영화에 녹여져 있는데 어떤 특정한 사실 때문에 선생님의 삶이 변형되거나 축소되거나 그런 건 도리가 아니겠다고 생각했다"며 "고민 끝에 이 작품이 가고자 했던 방향에 충실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감독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밝히면서 일찌감치 배성우의 등장을 예고했다.
코로나19로 개봉이 밀리고, 배성우의 음주 운전이 적발된 건 촬영이 모두 마무리된 2020년 11월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1947 보스톤'이 억울한 상황이긴 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범법행위를 한 배우가 민족의 영웅으로 활약하는 장면을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 줄 평: 그냥 달리기만 하는 이야기는 아니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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