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가 다르다
실력 없는 사람이 연장 탓만 할 때 ‘장비빨’만 세운다고 한다. 그렇지만 피아니스트들에겐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눈과 귀가 예민한 거장 피아니스트들은 누구보다 장비빨을 세운다. 일반인이 보기엔 다 같은 피아노지만, 연주자들에겐 브랜드별로 천양지차이고, 같은 브랜드의 피아노라도 조금씩 다르다.
짱짱한 고음과 음색의 밸런스, 오케스트라를 뚫어낼 힘을 고루 갖춘 ‘스타인웨이’가 압도적 대세이지만, 몇몇 예민한 예술가는 대세를 거스르고, 소수파를 자처한다.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독주회를 연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대표적이다. 플레트뇨프는 연주할 때 시게루사의 ‘시게루 가와이’란 일본 피아노 브랜드만을 쓴다. 대다수 피아니스트가 선호하는 ‘스타인웨이’는 “너무 크고 시끄럽다”는 게 이유다. 스타인웨이 일색의 공연장은 플레트뇨프가 2006년부터 6년간 피아노 곁을 떠나 지휘에만 전념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그를 다시 피아노 앞으로 이끈 건 ‘경비행기’ 같은 시게루 가와이 피아노를 만나고서부터다.
플레트뇨프는 시게루 가와이가 음량 조절이 탁월한 점을 높이 샀다고 전해진다. 보다 민첩하고 유연하게 반응하면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스타인웨이는 분명하고 명징한 소리가 강점이다. “아마추어와 전문 비행사는 똑같은 비행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전문 비행사에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으며, 놀라운 곡예를 보여줄 수 있는 비행기가 필요해요. 나는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내달 내한하는 헝가리 피아노 거장 언드라시 시프는 오스트리아산 명품 ‘뵈젠도르퍼’를 무기로 쓴다. 시프는 전 세계 공연장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스타인웨이의 ‘폭력적 독점’에 대해 문제 삼는다. 물론 뵈젠도르퍼의 투명하고 따뜻한 음색도 선택에 한몫했을 것. 스타인웨이의 강점이 고음이라면, 뵈젠도르퍼는 단단한 저음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프는 지난해 내한 당시 “한 종류의 악기로 모든 레퍼토리를 연주하다 보니 피아니스트가 달라도 소리가 비슷해지고, 개성을 구별하기 힘들다”며 “악기로부터 비롯되는 사운드의 다양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밖에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과 전국 순회 독주회에서 뵈젠도르퍼를 선택했다. 박성용 전 금호그룹 명예회장이 후원한 피아노다. ‘마에스트로’ 정명훈도 피아노 연주를 자주 들려줬던 예전엔 뵈젠도르퍼 애호가로 유명했다.
2021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피아니스트 브루스 리우는 이탈리아 브랜드인 ‘파지올리’를 선택해 주목받았다. 그보다 앞서 2010년 같은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율리아나 아브데예바는 콩쿠르 당시엔 ‘야마하’를 썼지만 지금은 스타인웨이를 쓰고 있다.
대다수 연주자는 스타인웨이를 선호한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글렌 굴드, 마르타 아르헤리치에서부터 한국의 슈퍼스타 조성진, 임윤찬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다수가 쓰는 스타인웨이라고 다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같은 브랜드라도 피아노마다 조금씩 음색과 느낌이 다르다. 연주자들이 공연에 앞서 피아노 선택을 중요시하는 이유다.
남보다 더 돋보여야 하는 콩쿠르 무대라면 보다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임윤찬이 지난해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당시 연주하기로 했던 독일산 스타인웨이 대신 미국산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교체한 사실은 유명하다. 연주자들은 콩쿠르 결선 무대에 오르기 전 대회에서 제공한 여러 대의 피아노를 신중히 눌러보며 가장 잘 맞는 피아노를 선택한다. 다만 피아노를 선택할 수 있는 콩쿠르 무대와 달리 일반 공연에선 콘서트홀에 구비된 피아노에 맞춰 연주해야 하는 게 대다수 연주자의 현실이다.
장비빨을 세워야 하니 그 장비를 공수하는 것도 일이다. 2019년 내한 당시 일본에서 직접 시게루 가와이 피아노를 들여왔던 플레트뇨프는 이번엔 국내에 있는 시게루 가와이 피아노를 3일간 조율한 후 사용했다. 이틀간 해머(내부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장비) 교체 등을 진행했고, 공연 당일 도쿄(東京) 시게루 본사에서 온 조율사가 최종 조율 작업을 했다.
시프는 올해도 뵈젠도르퍼를 사용한다. 공연 프로그램은 정하지 않았지만 장비는 일찌감치 정한 셈. 전속 조율사가 동행한다. 이르면 올해 말 내한하는 명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은 피아노 조율 작업을 손수 한다. 그와 동행하는 스타인웨이 전속 조율사는 부수적 작업만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우 기자 krust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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