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자 기왓조각에 ‘묻지마’ 사적지정 왜? 2000년 전쟁터니까[이기환의 Hi-story](100)
겨우 ‘칠(七)’이라고 찍힌 명문 기왓조각이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덕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된(2002년 1월) 산성이 있습니다. 경기 파주 적성 중성산(해발 148m)에 조성된 칠중성입니다. 변변한 발굴조사 한번 없었습니다.
1982~2000년 사이 5차례에 걸쳐 지표 및 정밀지표조사를 벌이는 데 그쳤습니다. 다만 2000년 정밀지표조사 때 성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 중 ‘칠(七)’ 자 명문 기왓조각이 나온 게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데 문화재위원회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곧바로 사적으로 지정하자”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칠’ 자 명문 기왓조각 1점 나왔다고 ‘묻지마 지정’이라는 얘기인가요. 경솔한 결정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사실 수백·수천 년된 삶의 흔적을 파헤치는 ‘발굴조사’는 원칙적으로 ‘유적 파괴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유적의 성격이 파악되면 더 이상의 발굴을 자제하는 게 옳은 판단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칠(七)’ 자 명문 기와의 수습으로 칠중성의 전모를 밝혀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산성의 나라’지만
사실 ‘한국=산성의 나라’입니다. 한반도에서 확인된 산성만 1200곳 정도로 추산되거든요.
산성이 대유행했던 시기가 삼국시대인 4~7세기였는데요.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 등장하는 산성의 절대다수가 그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중 위치와 역사적인 맥락이 일관성 있게 파악된 산성이 몇 안 되는데요. 그중 하나가 칠중성입니다.
“638년(선덕여왕 7)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시작으로 고구려-신라, 신라-당나라 간의 전투 기록이 이어집니다. ‘칠중성’으로 못 박은 기록만 그렇고요. 백제 창업주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8)의 일화가 있습니다.
“기원전 1년 온조가 칠중하에서 말갈의 추장을 잡아~나머지 적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칠중하’는 칠중성 앞을 흐르는 임진강의 별칭입니다.
칠중성은 5세기 후반까지는 백제의 영역이었는데요. 475년 고구려의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 땅이 됐다가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553) 6세기 후반에는 신라의 영역이 됐습니다.
“칠중성을 사수하라”
칠중성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국제 화약고가 됩니다. 사실 칠중성은 해발 148m에 불과한 중성산에 조성됐습니다.
산이라고 하기에도 남세스럽죠. 하지만 절대 ‘띄엄띄엄’ 볼 수 없습니다. 칠중성 정상에 서면 구불구불한 임진강 북쪽으로 황해도가 손에 잡힙니다. 뒤에는 감악산(해발 675m)이 받쳐줍니다. 설마리 계곡을 따라가면 의정부와 서울이 지호지간(指呼之間)입니다.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뜻입니다.
<삼국사기>의 638년 신라-고구려 간 접전은 ‘칠중성’ 이름 석 자를 두고 벌어진 첫 번째 전투입니다.
“638년(선덕여왕 7) 10월 고구려군이 칠중성을 침범하자 백성이 놀라고 동요해 산골짜기로 피란했다”는 겁니다. 선덕여왕은 대장군 알천(생몰년 미상)을 급파합니다. 알천은 선덕여왕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11월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알천이 누구입니까. 진덕여왕의 사후인 654년 ‘섭정(대리청정)’을 위임받았지만, 김춘추(태종무열왕·재임 654~661)에게 양보한 핵심인사입니다. 선덕여왕은 그런 거물을 파견할 만큼 고구려와의 국경에 있는 칠중성 방어에 사활을 걸고 총력을 기울였던 겁니다.
‘필부의 순국’
22년 뒤인 660년 7월 한반도가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죠. 백제 부흥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신라는 백제부흥군과 맞서느라 고구려와의 국경지역인 칠중성 방어에 소홀해집니다. 이를 걱정한 태종무열왕은 ‘충성스럽고 용맹한’ 필부를 현령으로 임명합니다.
과연 고구려가 660년 11월 1일 칠중성 공략에 나섭니다.
“고구려군이 칠중성에 쳐들어왔다. 필부가 20일이나 성을 사수했다. 고구려 장수가 포기하고 퇴각하려 했다. 이때 반역자 대사마 비삽이 은밀히 고구려군에 사람을 보내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치라’고 알렸다.”(<삼국사기> ‘열전·필부’조)
이 사실을 알아차린 필부는 비삽의 목을 친 뒤 휘하 장수들과 함께 군사들을 독려합니다. 신라군의 약점을 알게 된 고구려군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火功)으로 핍박했습니다. 신라군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졌습니다.
“필부는 빗발치는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릴 때까지 싸우다 죽었다. 왕(태종무열왕)이 필부의 전사 소식을 듣고 구슬피 울었다.”(<삼국사기> ‘열전·필부’조)
‘보급품 보내라고 아우성친 당군’
칠중성을 획득한 고구려지만 군대를 오래 주둔시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구려가 임진강~한강 사이를 안정적으로 차지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런 마당에 칠중성을 고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임진강 남쪽에 자리 잡은 칠중성은 배수의 진을 친 셈이 되겠죠. 고구려군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661년 12월 칠중성 앞을 흐르는 칠중하가 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 또한 드라마 한편 거리가 너끈합니다. 평양성을 공격하던 당나라 소정방(592~667)이 “군량미는 왜 보내지 않는 거냐”고 아우성칩니다.
문무왕은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신료들은 “적진(고구려) 한복판까지 군량미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때 67세의 노장 김유신(595~673)이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 손을 들고 나섭니다.
김유신은 9명의 장군과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떠납니다. 당나라군에게 보낼 군량미는 쌀 4000석과 조 2만2000석이었습니다. 은 5700푼, ‘가늘게 짠 베(細布)’ 30필, 머리카락(30냥), 우황 19냥 등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자그마치 수레 2000대에 실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신라의 국고를 탈탈 털어간 겁니다.
김유신의 보급부대는 이듬해(662) 1월 23일 칠중하에 도달했습니다. 칠중하를 건너면 명실상부한 고구려 땅이었죠. 모두 두려워 배에 오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김유신이 “만약 죽기를 두려워한다면 어찌 여기에 왔느냐”고 독려하며 먼저 배를 탔습니다.
그제야 여러 장수와 병졸들이 쫓아왔습니다. 고구려 땅에 진입한 김유신군은 고난의 행군을 견뎌야 했습니다. 강추위에 소와 말은 물론 군사들까지 얼어 죽어나갔습니다. 도중에 고구려군을 만나 악전고투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평양 인근에 도착한 신라군은 당나라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662년 2월 6일).
신라를 ‘뺑뺑이 돌린’ 당나라
그런데 당나라군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은 “군량미를 받은 소정방의 당나라군이 곧바로 철군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당나라군의 철군 소식에 이미 적진 깊숙이 들어온 김유신군도 기겁을 하고 군사를 돌렸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에 닿은 신라군은 표하(칠중하~호로고루 쪽 호로하)를 건너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대군이 추격해왔습니다. 이때 김유신은 군사를 돌려 고구려 장수 아달혜를 생포하고 고구려군 1만명의 목을 벴답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칠중성의 성격이 바뀝니다.
“675년(문무왕15) (당나라) 유인궤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깨뜨리고 돌아갔다. …당군이 거란·말갈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칠중성이 신라와 당나라가 뺏고 빼앗는 치열한 전쟁터로 변한 겁니다.
인해전술의 무대가 된 칠중성
유인궤의 당나라군이 쳐들어온 지 정확히 1276년이 흐른 1951년 4월이었습니다. 칠중성은 남북 분단과 동서 냉전의 이른바 ‘칼날의 끝’이 되어 또 한 번 역사의 전면에 나옵니다. 이번엔 외국군대끼리, 즉 영국군과 중국군이 혈투를 벌이죠. 한국전쟁 때 칠중성을 지킨 부대는 영연방 29여단 휘하의 글로스터 대대였는데요. 그들은 칠중성에 ‘캐슬고지’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당시 영국군 대위 안소니 파라 호커리(1924~2006)의 회고를 들어볼까요. 4월 22일 밤 10시 중국군 3개 사단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고 총을 쏘면서 임진강(칠중하)을 도하하기 시작했답니다.
“습격자들이 등장했다. 연카키색 군복에 허름한 면 모자와 고무창 댄 신발 차림으로, 가슴과 등에는 탄띠를 교차해서 맨 수백명의 중공군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영국군이 발포를 시작했지만, 온 들판과 고지 기슭이 사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이 불어대는 뿔피리와 꽹과리는 마치 저승사자의 고함 같았습니다. 인해전술이었습니다. 고지는 불과 6시간 만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영국군이 ‘낫으로 풀을 베듯’ 기관총을 쏘아댔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후퇴한 영국군은 감악산 설마리 계곡, 즉 서울행 계곡 쪽으로 빠졌습니다.
중국군은 순식간에 계곡의 양쪽을 점령한 뒤 계곡을 따라가는 영국군을 공격했습니다. 중국은 이 전투를 대단한 전과로 여겼습니다. 아편전쟁(제1차 1840~1842·제2차 1856~1860) 때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당한 치욕을 갚은 셈이니까요.
“중국군의 서울 재점령을 막았다”
3일간의 격전 끝에 글로스터 부대 800여명 중 3분의 1 정도의 병력이 손실을 입었고요. 40여명만이 무사 귀환했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포로가 됐습니다. 전투 결과로만 보면 영국군의 궤멸로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로스터 부대원들은 영웅이 됐습니다. 7만여 중국군의 제5차 공세를 3일이나 지연시켜 서울의 재점령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글로스터 부대가 속한 영국군 29여단에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병사들도 배속돼 있었는데요. 그들 역시 중국군의 공세에 고립된 뒤 가까스로 전곡으로 탈출했습니다. 캐슬고지(칠중성)는 이렇게 4개국 젊은이들의 피가 서린 곳입니다.
제임스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1892 ~1992)은 “현대전에 있어서 단위 부대의 용기를 과시한 가장 뛰어난 귀감”이라고 극찬했답니다. 특히 영국인들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전투였죠.
얼마 전 끝난 새만금 세계잼버리대회에 참가한 영국 스카우트 대원 200여명이 설마리 영국군 추모공원을 찾아왔습니다.
해마다 4월이면 캐슬고지와 설마리 전투에 참전한 글로스터 부대를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리고 있고요. 2001년엔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1926~2022·재위 1952~2022)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요코 공작)가 추모공원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죠.
특히 당시 포로가 된 안소니 파라 호커리 대위는 7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는데요. 호커리는 전쟁 후 <대검의 칼날(The edge of the sword)>이라는 회고록(번역판은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한국언론인협회 간)을 펴냈습니다. ‘대검의 칼날’은 바로 캐슬고지(칠중성)와 그곳에서 불가능한 싸움을 벌였던 영국군의 운명을 표현한 건데요.
아닌 게 아니라 칠중성은 2000년 전부터 백제-말갈-고구려-신라-당나라-영국-중국 젊은이들의 피가 서린 ‘대검의 칼날’입니다.
지난 9월 8일 칠중성의 정비복원계획을 준비하기 위한 학술대회가 열렸는데요.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2000년 가까이 국제전쟁터였던 칠중성의 성격과 가치를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정비복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삼국시대 유구는 물론 한국전쟁 때 영국군의 자취도 남아 있고, 또 이후 군부대가 설치한 참호와 교통로 등이 중첩돼 있는데요. 이름 그대로 일곱 겹의 성인 칠중성이 됐네요. 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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