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산행] 전설의 황모시나비를 찾아…다이세쓰 설산에 들다

장창영 여행작가 2023. 9. 12.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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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홋카이도 다이세쓰산 나비탐사기
고생 끝에 만난 황모시나비. 날개나 생김새를 보니 황모시나비가 분명했지만, 색깔은 생각보다 노랗진 않았다.

나는 나비 애호가다. 나비의 매력에 빠지게 된 건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식물과 야생화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우연한 계기로 나비생태학교에 참석하게 됐는데, 이것이 나비 사랑의 시작이었다.

이곳에서는 나비가 번데기에서 성충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나뭇잎을 닮은 별 볼 일 없는 번데기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두 눈으로 목격한 나는 자연스레 나비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

모임을 만들어 매주 나비 탐사를 다녔다. <초보자를 위한 한국 나비 생태 도감> 저자인 오해룡 선생도 이 모임에서 알게 됐다. 우리는 나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황모시나비의 팬이었다. 그는 황모시나비를 보겠다는 꿈을 10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도 황모시나비에 대해 알게 됐다.

아카다케에서 바라본 풍경. 7월의 고산은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곳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오해룡씨는 일본으로 직접 '그 나비'를 보러가자고 했다.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한국의 산도 많이 오르지 않은 내가 나비를 보기 위해 이국의 산을 오른다니. 심지어 황모시나비가 살고 있는 홋카이도北海道 다이세쓰산大雪山(2,290m)은 등산해야만 오를 수 있는 고산이었다.

한여름에도 눈으로 덮인 산. 그곳에 사는 천연기념물 황모시나비. '도대체 이 나비는 눈 속에서 무엇을 먹고 살며, 추운 곳에서 어떻게 지내는 걸까?'라는 의문과 호기심이 생겼다. 직접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결국 나는 다이세쓰산으로 산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번 산행의 목적은 단 하나, 나비였다. 다이세쓰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전설의 황모시나비를 보기 위해 홋카이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표범나비류에 속하는 다이세쓰산 아사히효몬나비. 1965년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수집을 금지하고 있다.

흐리면 활동 적은 나비

삿포로 시내에서 구몬 다카시씨를 만났다. 그는 한국의 나비를 보기 위해 30번 가까이 한국을 찾았을 정도로 나비를 사랑하는 나비 애호가인데, 우리와 함께 황모시나비를 보기 위해 도쿄에서 왔다. 우리는 곧장 다이세쓰산 근처의 온천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총 4일을 묵었는데, 아무리 날이 안 좋아도 4일 중 하루 정도는 나비를 관찰하기 좋은 날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행의 초점을 황모시나비에 집중했다. 바다 건너 일본까지 왔는데,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다.

온천 숙소 주인은 나비 애호가였다. 숙소 곳곳에 나비를 비롯한, 야생화와 곤충 사진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나비를 보러 왔다고 하자 그는 본인이 기록한 나비 관찰 지도를 내어주었다. 더불어 여러 조언도 해주었다.

나비 관찰 장소도 알았고. 이제 중요한 건 날씨였다. 기상예보는 3일 내내 비 소식을 알렸는데, 다행히 둘째 날과 마지막 날 오전에는 비 예보가 없었다. 이때가 기회였다. 아침 일찍 산에 오른다면 나비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이세쓰산 고유종 타카네히카게나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둘째 날 새벽 5시, 숙소에서 출발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등산로 입구까지의 길은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넘나들었다. 가는 길 내내 온몸이 흔들렸다. 입구에 도착할 때쯤 남아 있던 잠은 싹 달아나고 없었다.

입산 명부에 이름을 쓰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의 계곡'이 나왔다. 뭐가 있나 싶어 아래를 힐끔 내려다봤는데 천길낭떠러지였다. 아찔했다. 깊이가 100m는 되어 보이는 산비탈이 발아래 놓여 있었다. 그곳엔 안개가 자욱했는데,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등산로 옆으로는 눈이 쌓여 있었다. 스틱으로 찍어 보니 30cm 정도 깊이였다. 6월이었음에도 아직 겨울의 흔적이 만연했다. 우리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스틱에 의지해 이 구간을 단숨에 돌파했다.

쐐기풀나비. 한국과 모양은 다르지만, 한국에서 보기 힘든 나비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잠시 후, 숙소 주인이 알려준 나비 관찰 위치에 도착했다. 숨을 돌리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 곧바로 나비를 찾기 시작했다. 30분, 1시간, 시간이 흘러도 나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꽝인가 싶던 찰나! 눈앞으로 나비 두 마리가 나타났다. 다이세쓰산의 명물 아사히효몬アサヒヒョウモン과 타카네히카게タカネヒカゲ였다. 이 나비들 황모시나비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다이세쓰산에서만 볼 수 있다는 귀한 나비였다. 나비들은 오래도록 제자리에 머물렀다. 나비들은 따뜻해야 활발히 움직이는 특성이 있는데, 이날은 추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느긋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황모시나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2시부터 비 예보가 있었던 터라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오후 1시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오전 11시부터 조금씩 두꺼운 비가 내려 옷이 젖기 시작했다. 나비도 좋지만 안전이 우선이었다. 다른 날을 기약하고 철수하기로 했다.

나비는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 나비를 보았다고 해서 서둘러 달려가도 이미 자취를 감춘 경우도 허다하다. 나비는 새처럼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과 달리 나비나 새를 관찰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번 다이세쓰산 나비 탐사에 함께한 동료들. 이 중 한 명은 황모시나비를 보기 위해 10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만난 황모시나비

이틀 뒤 우리는 다시 산을 찾았다. 주말이라 주차장에는 차들이 이전보다 꽤 많았다. 다이세쓰산은 야생화로도 유명한데, 암매를 비롯한 여러 야생화들을 보기 위해 찾은 이들도 눈에 띄었다. 야생화들은 등산로 초입부터 약 2,000m 고지의 아카다케赤岳까지 이어지는 등산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틀 전과 달리 날씨가 무척 좋았다. 해가 만드는 온기와 푸른 하늘이 산행의 즐거움을 더했다. 오늘은 우리와 같이 나비를 보기 위해 산에 오른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모두가 황모시나비를 볼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산행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비 관찰지에 도착했다. 일행들은 곧바로 관찰을 준비했는데,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등산로로 들어섰다. 아직 추운 아침이라 활동하는 나비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 시간을 활용해 정상까지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잠시 후 엊그제 발걸음을 멈췄던 길이 보였다. 그때는 안개가 자욱하고 위험해 보여 올라갈 엄두를 못 냈는데, 지금 보니 해볼 만했다. 사람들은 아이젠 없이 그곳을 척척 오르고 있었다.

홋카이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다이세쓰산 아카다케(2,078m) 정상에서 필자

경사가 완만한 눈길이었지만, 길이는 약 300m로 만만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아이젠과 스틱도 없어 그곳을 오르는 것은 꽤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나아갔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온몸을 쓰며 간신히 경사를 올랐다.

그렇게 짧은 눈길을 오르고 나니 그림 같은 풍경이 나왔다. 웅장한 초록빛이 넘실대는 언덕이 끝없이 펼쳐졌다. 잠시 자리에 멈춰 풍경을 감상했다. 거친 숨이 사그라들었을 때쯤 다시 앞선 이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이정표가 없는 곳은 노란 화살표를 보고 걸었다. 언제 정상에 도착하나 싶었는데, 마침 앞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정상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예상대로 정상을 알리는 정상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아카다케(2,078m) 정상에 섰다.

아카다케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다이세쓰산은 홋카이도의 최고봉 아사히다케旭岳를 비롯해 10여 개의 2,000m급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홋카이도의 최고봉 아사히다케旭岳(2,290m)를 비롯해 호쿠친산北鎭岳, 구로다케산黑岳, 하쿠운산白雲岳 등 해발고도 2,000m 안팎의 고봉이 10여 개나 이어져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고산의 모습이 펼쳐졌다. 곳곳에 자리 잡은 하얀 눈은 초록 물결과 짝을 이루고 있었고, 수많은 야생화들이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몸이 휘청거렸지만, 맑은 날씨 덕에 멀리까지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특별한 설명이나 수식이 없어도 저절로 눈길이 머물렀다. 내가 이렇게 멋진 곳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여름의 설산은 아직도 각별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구경을 마치고 일행들이 있는 1850고지로 내려갔다. 하산길은 미끄러운 눈 때문에 올라갈 때보다 더 힘들었다. 옆으로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나비, 그들은 스키. 다이세쓰산을 찾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이 멋진 산을 즐기고 있었다.

설산이 녹으면서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와 야생화가 만들어 낸 평화로운 세상.

저 아래 일행들이 보였다. 고도를 조금 낮춘 덕분인지, 정상보다 훨씬 따뜻했다. 지금쯤이면 황모시나비가 훨훨 날아다니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행은 여전히 나비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아까 짝짓기 하는 황모시나비를 찍었다며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황모시나비의 그림자만 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었다. 나비는 바람이 세게 불면 날지 못한다. 날개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런 시간이 계속됐다. 점점 나비를 보지 못할까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이세쓰산 정상으로 가는 길. 이곳에서 300m 정도의 가파른 눈 계곡을 지나야 한다.

오전 11시가 넘어가면서 바람이 잔잔해졌다. 그때 나비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날갯짓, 연한 노란빛, 황모시나비였다. 하지만 나비는 좀처럼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망원 카메라로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가까이 왔나 싶으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기다림에는 보상이 있는 법. 잠깐 나비의 움직임이 느려진 찰나, 이때를 틈타 극적으로 황모시나비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

황모시나비를 본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 나비는 보통 나비와 달리 알에서 애벌레, 번데기, 성충으로 이어지는 기간이 매우 길다. 알에서 성충이 될 때까지는 2년이 걸리는데, 첫 번째 겨울은 알로 지내고, 이듬해 늦여름에 번데기가 되어 그대로 월동한다. 그리고 3년째 초여름에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는 '우화'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모시나비의 주된 먹이인 고산식물 고마쿠사.

따라서 1년에 1~2회 우화하는 일반적인 나비에 비해 2년에 한 번 우화하는 황모시나비는 야생에서 볼 확률이 낮다. 서식지도 일본 홋카이도 고산지대에 한정되어 있으니 그 확률이 더 낮아진다. 이번 나비 탐사에 함께했던 구몬 다카시씨 역시 처음 황모시나비를 보았다고 했다. 우리 모두 로또를 맞은 것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황모시나비가 있던 곳 옆으로 보라색 꽃이 눈에 띄었다. 모습은 숙소 주인이 일러준 황모시나비의 먹이식물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식물의 이름은 고마쿠사コマクサ였다. 고마쿠사는 다이세쓰산 곳곳에 피어 있었다. 황모시나비들이 이 꽃 주변을 배회하는 것도 보였다. '눈 덮인 고산에서 황모시나비는 무얼 먹으며 지낼까?'라는 의문에 해답을 찾는 순간이었다.

다이세쓰산에는 아이누 사람들이 '신의 정원'이라고 불렀다는 야생화지대가 있다. 여름 다이세쓰산에는 암매를 비롯한 다양한 야생화가 피어 있다.

생각지도 않았던 다이세쓰산 등산과 꿈에 그리던 황모시나비를 만나고 내려오는 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급하게 올라가느라 보지 못했던 풍경도 천천히 둘러봤다. '언제 또 이곳을 올 수 있을까?'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산은 아쉬움을 더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쐐기풀나비 한 마리가 옆에 앉았다.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 신이 보낸 선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봤다. 여전히 사람들은 다이세쓰산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이세쓰산이 내게 아름다운 나비들을 선물했듯, 앞으로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추억을 남겨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여름 이곳에서 운 좋게 황모시나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신의 영역이었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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