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와 나의 사적인 이야기: 3화 [이환주의 아트살롱]
서울 경희대학교 본관 2004년, 기말 고사가 끝나고 크리스마스를 2주 정도 앞둔 12월 중순이었다.
중앙도서관, 종합강의동 등 학교의 주요 건물마다 교지가 쌓여있었다. 교지에는 내가 보낸 단편 소설도 실려있었다. 이름과 소속학부, 이메일이 내 글과 함께 실려 있었다. 종이로 된 공식 출판물에서 내 글을 보게 되니 남다른 느낌이 들었다. 당시 썼던 소설의 제목은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부제는 '학교 가는 지하철의 두 고양이 소녀에 대해'였다. 아래는 전문. 해당 글은 2004년 경희대학교의 교지와, 필자가 별도로 운영하는 브런치에도 동일하게 실려 있다.
1.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바보 같은 질문이다. 어째서 하필 고양이인가?
하지만 그건 내 쪽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양이라는 말은 성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말과 함께, 고양이적 신비스러운 힘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햇빛을 반사해 솜털이 반짝거리는 소녀의 하얀 목선이나, 부드럽고 적당하게 솟은 봉긋한 가슴, 아킬레스건이 드러나는 투명 에나멜 샌들을 신은 소녀의 발"과 같은 말처럼 고양이란 말은 나를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2. 2004년의 어느 목요일과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후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면도를 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초록색의 촌스러운 수건으로 머리를 몇 번 털어 대충 말리고 TV를 켰다. 남아메리카의 어느 오지에 사는 원시 부족의 삶을 보면서 설탕이 묻어 있는 콘 시리얼을 우유에 말고, 설탕에 잰 토마토를 먹었다. 설탕이 듬뿍 있는 페스츄리 빵도 먹을까 하다가 형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사실 이건 거짓말이다- 페스츄리 빵 따위 내 아침식사엔 없었다. 이제부터는 설탕이 묻어 있는 콘 시리얼과 설탕에 잰 토마토를 먹고 설탕이 듬뿍 있는 페스츄리 빵을 형의 몫으로 남겨 놓은 한 소년의 이야기다. 소년과 동의하에 소년을 칭하는 말은 ‘나’로 하기로 한다. 대충의 아침을 챙겨 먹고 ‘나’는 여느 2004년의 목요일처럼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 탔다.
최근 반년 동안의 관성으로 지하철에 탄 후 하루키를 읽는다. 빨간색 표지의 400페이지가 넘는 ‘화요일의 여자들’이란 단편집이다. 책도 상당히 무거울뿐더러, 어제 동아리 사람들과 같이 늦게 까지 술을 먹은 탓인지 상당히 피곤하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는 내 앞에 자리가 나도 좀처럼 앉지 않지만 피곤을 핑계로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앉는다.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 좌석을 차지한 학생이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행동- 책을 읽거나 잔다- 중에 전자의 것을 택한다. 전날 읽던 단편 하나를 다 읽은 후 책을 덮는다. 잠을 자려고 눈을 붙인다. 울타리를 넘는 양의 수를 세려다 관두고 고양이에 대해 생각한다.
3. 현재 고양이를 기르지 않지만 나는 꽤 여러 마리를 고양이를 길렀었다. 지금은 모두 사리지고 없지만. 얼마간 기르다가 고양이가 집을 나간 적도 있고, 잠깐 바깥을 구경하러 나간 새에 누가 가져가서 대신 키워 준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가 기른 고양이는 모두 사라졌다. 한 번은 몇 년 동안 길렀던 암컷 고양이-기르는 동안 두 번 새끼를 낳았다- 가 차에 치여서 죽었다. 당시에는 고양이의 장례식을 치러줄 정도의 집안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양이의 주검은 아버지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과연 사라진 고양이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라진 고양이들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고 고양이 별에 대해 생각한다.
고양이 별인은 태어날 때 고양이 가면을 쓴 채로 태어난다. 12살이 되는 해에 성인식을 치르게 되는데 이날 고양이 별인은 고양이 가면을 벗고 한 명의 당당한 고양이 별의 성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물론 고양이 가면 속의 얼굴도 고양이다. 고양이 별인인 것이다. 하지만 종종 고양이 가면 속의 얼굴이 사람인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그 고양이 별인은 고양이 별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햇살이 좋은 어느 날 대중교통의 창을 통해서.
지구로 추방된 고양이 별인은 평생 동안 고양이 별인 적 특징으로 살아갈 수도 있고, 어느 기간 동안에만 고양이 별인의 특징을 간직하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 별인은 지구에서 사는 동안 자신이 고양이 별인 이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고양이 별인을 알아볼 수 있다.
전생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전생이 있다라고 가정하면, 나는 전생에 수고양이였을지도 모른다. 전생에 대해 이제 처음 생각한 녀석의 전생 따윈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나는 역사상 가장 불쌍한 쥐였는지도 모른다. 안데스의 초원에서 양질의 풀을 먹고사는 오스트프리시안종 양의 우유로 만든 페루의 파마산 치즈로 앙고라 고양이에게 프러포즈를 했다가 한 끼의 점심이 되어버린. 뭐, 가장 이상적인 경우라면 상상력이 풍부한 고양이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저런 고양이 별에 대한 생각으로 잠이 오질 않았다. 자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책을 폈다. 책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없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깐! 고개를 멈추고 다시 흘끗 내 왼쪽을 처다 보았다. 한 소녀가 책을 읽고 있다.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단발머리를 가진 소녀다. 무슨 책을 읽을까라는 궁금증이 들 무렵 소녀가 살짝 고개를 든다. 머리의 커튼이 걷히고 소녀의 옆얼굴이 보인다. 매우 매력적인 옆모습이다. 몰래 소녀의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곧바로 책으로 시선을 옮긴다. 하지만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매력적인 소녀들이란 으레 멀리서 지켜보기에 좋은 존재들이다. 이런 소녀들이 보통 아무 생각 없이 지하철의 내 옆자리에라도 앉게 되면 보통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뿐더러 사고와 리듬을 어지럽혀 놓아 내 페이스를 잃게 만든다. 배려심이 없다기보다는 아예 모르는 것이다.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걸. 이쯤 되면 매력적인 소녀들에 대한 알레르기보다는 선천적으로 그런 종류의 소녀들에게 면역이 결핍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내 쪽의 이런 고충을 그런 소녀들이 알리 없다.
4. 바나나 빛이라기보다는 레몬 빛이 나는 부드러운 노란빛의 비닐 재킷 속에 같은 색 계통의 얇은 폴로 티를 입고 있다. 상의와 잘 어울리는 색 바지를 입고 분홍색의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얼핏 얼핏 보이는 소녀의 옆얼굴은 좀처럼 말로 할 수 없다.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고양이 소녀의 모습을 말로 표현하기란 내겐 불가능한 것이다.
매력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쳐다볼 수 도 없는 노릇이고 보니,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지만 혼자만 신경 쓰며 안절부절못하는데 저 쪽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 오기로라도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마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겠지만 꾀 긴 시간이 지났다고 느껴졌다. 소녀의 옆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자주 쳐다보면 혹시라도 이 쪽의 입장이 들킬까 봐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은근슬쩍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정도 그 고양이 소녀 적 옆모습의 리듬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리듬이 급속히 흐트러졌다. 주위를 둘러보는 중에 우연히도 내 오른쪽에 또 다른 고양이 소녀의 존재를 알아 버렸다. 다행히도 자고 있다.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소녀를 본다. 염색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약간은 금빛이 나는 단발머리가 조금은 상해있다. 붉은색 바탕에 검은 줄 이간 체크무늬 치마 위에는 커다란 캔버스용 가방을 올려놓았고, 그 위에 두 손을 모아 놓았다. 미술을 전공하거나 디자인을 전공하나 보다. 손톱은 봉선화 빛 바탕의 매니큐어에 흰색의 장미가 아주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고양이의 발톱으로 긁어놓은 듯한 아주 얇은 선이다.
두 번째의 고양이 소녀로 인해 책을 보는 것은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혼자서 안절부절못할 바엔 차라리 잠이라도 자면 좀 편해지겠지란 생각에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의식을 날려 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든 오른쪽의 고양이 소녀는 내게 기대 왔다. 얇은 티 하나를 통해 전해오는 소녀의 부드러운 팔의 감촉은 지금이 두꺼운 스웨터가 필요한 겨울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했다. 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살짝살짝 기대 오는 고양이 소녀를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지진 않는다.
혹시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춘기의 고양이 소녀가 내 생각을 알아채고 “당신은 언제나 그런 생각뿐인가요?”라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한동안 생각 끝에 정답은 아니지만 그 상황을 모면할 만한 답을 찾는다.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분명히 내 입술을 움직이고, 성대를 떨게 한 것 같은데 공기의 진동까지는 이어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소녀의 잠을 깨울 만큼의 진동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그저 상상일 뿐인 사고의 소리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고양이 소녀는 여전히 내 오른쪽 어깨에 고개를 기울인 채 잠을 자고 있다.
5. 지하철의 창을 통과한 보통의 빛 보다 더 무거운 밀도를 지닌 빛이 내 목덜미와 등을 덥힌다. 고양이 혹성으로부터의 빛일지도 모른다. 눈을 뜬다. 아마 잠들었었나 보다. 하긴, 내 페이스를 너무 잃었다. 두 고양이 소녀 모두 내린 모양이다. 내 오른쪽 자리는 비어있고 왼쪽에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아저씨가 앉아 있다. 내 상상이었는지, 엷은 꿈이었는지 모를 흐릿한 기억이 있다. 그 상상에서(혹은 꿈에서) 난 고양이 소년이었다. 지금과는 정 반대인. 꿈에서 나는 한 고양이 소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고양이 소녀에게 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현실적인 언어로 고백한다.
교지가 발행되고 며칠이 지난 뒤에 나는 하나의 이메일을 받게 된다.
이메일의 제목은 내가 쓴 글인 "고양이를 좋아하세요?"였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이메일의 내용이 정확히는 기억 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교지에서 내가 쓴 글을 재미있게 봤으며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살면서 칭찬을 별로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소설 '소나기'의 칭찬 이후로 모처럼 듣게된 아주 기분 좋은 말이었다. 마음속으로 이런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여자일 확률이 높을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켠에서 어쩌면 대학 1년 동안 나와 친해진 놈들 중에 한 두 놈이 나를 놀리기 위해 고도로 공을 들인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12월 중순부터 몇 번의 메일을 주고 받으며 상대방이 여자이며,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상대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여자친구가 없었던 필자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두고 상대에게 과감하게 이메일로 데이트를 신청했다. "저기, 크리스마스 이브에 별 일이 없다면 우리 학교 정문에서 한 번 만나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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