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노트에 습작하다 고3 때 낸 첫 시집… 미당이 제목·서문 써줬다
낡고 빛바랜 종이 뭉치 속엔 당돌했던 한 소녀가 있었다.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 인근에서 만난 문정희(76) 시인은 비닐장갑을 낀 채로, 포장지에서 학창 시절 습작 노트를 꺼내 보였다. 장롱 속에 60년 넘게 보관했다는 뭉치에는 소설과 희곡 원고지 2000여 장, 단상을 적은 대학 노트 5권 등이 섞여 있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게서 삶의 이치를 배운다” 같은 세계와 생명에 대한 소녀의 고민으로 가득한 글들. 그는 “어려서 인생을 몰랐을 때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었는가 싶다. 너무 아는 체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산업화 시기 여성 목소리 詩에 써내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종이 더미에서 오직 한 장 남은 공책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표지 모서리가 꼬깃꼬깃하게 접힌 채, 내용물은 사라진 공책. 하단에는 ‘광주 서석 국민학교/ 제육학년 십일반/ 문정희’, 그 위엔 빨갛고 큰 글씨로 ‘잘되면 출판키로 함-오빠-/ 문집/ 꿈을 찾아서’라고 적혀 있었다. 위의 글씨는 꿈을 지지해 준 친오빠가 적어준 것이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전교생 20여 명 규모 국민학교에 다니던 그는 5학년 때 홀로 유학을 시작했다. 국민학교 때 광주광역시로, 중학교 때 서울로 간 그는 홀로서기의 두려움을 ‘시’로 극복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집안에선 그가 학교 선생이 되기를 바랐다. “처음에 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어른들은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조선 시대까지 여성 시인은 주로 기생이었고, 개화 직후 문학을 한 여성들의 인생이 불행하고 당돌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여성으로서 편한 삶을 살았으면 했지만, 저는 매일 써야만 행복했습니다. 내면에서 어떤 폭발물이 끓어 나왔어요.”
문정희가 시인이자 여성으로서 살아온 삶은, 해방 이후 한국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찾는 과정과 같았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그는 생명의 신성함을 예찬하고,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해 왔다. 현역 시인인 그는 2010년 스웨덴이 동아시아 시인에게 수여하는 시카다상을 받고, 지금까지 시집 14권이 1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작년 10월부터는 국립한국문학관장으로서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제 시 쓰기의 토양은 전통적 가부장 사회였어요. 일생 동안 부엌과 안방을 오가며 남성의 보조자로서 살아야 했던 가부장 사회에서 태어났지만, 산업 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 성장했죠. 달라진 시대에 교육을 받은 덕분에, 가부장적 언어로 시를 쓰지 않은 첫 여성 시인이 됐습니다.”
그가 환멸을 느낀 여성의 삶은 특별한, 소수의 경험이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 집안일을 맡던 여성들이 산업화 물결에서 사회로 나섰으나, 집안에서의 삶은 달라지지 않아 겪어야 했던 이야기. 시인은 “취업과 결혼을 하며 ‘천년의 얼음덩이’와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잡지사에 취직할 때는 결혼하면 관둬야 한다는 약속도 했었다”며 “출산 같은 가부장적 차별이 자유롭고 싶었던 제 날개를 꺾어뜨리며, 좌절을 겪었다”고 했다.
서정주와 인연, 최초 여고생 시집으로
시집 ‘꽃숨’(1965)은 절판돼 만나보기 어려운 희귀본이다. 문 시인이 진명여고 3학년 때 한국 여고생으론 처음 낸 시집으로, 고(故)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서문을 실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65년 동국대에서 미당이 심사를 본 백일장에서 여고생 문정희가 장원에 입상하며 시작됐다. 미당은 ‘우리말로 가장 예쁜 첫 숨결’이라는 뜻에서 문정희의 첫 시집 ‘꽃숨’ 제목을 짓고, “여기 이 시집의 주인 문정희양은 금년에 진명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인 17세의 소녀로서”로 시작되는 서문을 썼다. 미당은 문 시인이 등단 이후 첫 시집 ‘문정희 시집’(1973)을 낼 때도 서문을 써서 그를 격려했다.
문 시인은 “미당 선생은 일찍 핀 꽃이 일찍 시들듯, 어린 나이에 재능을 보이는 걸 환영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제가 지금까지 시인으로서 살아남았다는 게 새삼 놀랍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시인은 최근 계간지 ‘문학나무’ 가을 호에 발표한 시 ‘이름’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 ‘이름 남겨서 뭐 하게’라고 답한 작가의 이야기다. “시인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이름으로 남아서 뭐 하겠습니까. 사는 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파닥거렸다는 것의 증거로 작품이 몇 개 남았다는 정도이죠. 한국 여성으로서 60년 가까이 오직 썼고, 생명의 당당함에 대해 늘 노래할 수 있던 삶이 참 괜찮았습니다.”
“반골 기질이 창작의 혼”
미당에게 선물받은 ‘백자 향로’는 입구 한쪽이 찌그러져 있다. 소장품으로서 가치는 없지만, 문 시인이 각별히 아끼는 물건. “미당 선생이 수집하던 향로가 많았는데, 이 향로가 마음에 들었어요. 선생이 왜 좋냐고 물어봐 ‘찌그러져서 멋있다’고 답했죠.” 미당은 향로를 주며 ‘비뚤어진 것이 온전하다’는 뜻으로 ‘곡즉전(曲則全)’이라 말했다고 한다. 최근 시인이 계간지 ‘문학나무’ 가을 호에 발표한 시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에도 이런 시인의 삶이 드러났다. 새에덴교회 소강석(61) 목사가 정율성 기념 공원 추진과 관련, 이 시를 인용하며 최근 다시 화제가 됐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얼굴에 눈이 한 개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캄캄한 절벽이다/ 어디로 갔을까/ 내 한쪽 눈/ (중략) / 부패한 수족관 같은 tv뉴스 화면에서/ 한 눈 가진 사람과 두 눈 가진 사람이/ 서로를 병신이라 우기고 있다/ 나는 울었다/ 그런데 내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좌파도 우파도 아닌 내 한쪽 눈/ 어디로 갔을까/ 내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시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중에서)
문정희는 호남 출신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대책이 안 서는 반골 기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열한 살에 홀로 고향을 떠나 평생을 떠돌았지만, 어린 날 겪은 가족의 언어에는 기존 것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 있었다. 그 부정 의식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바탕이 됐다”고 했다. 또 그는 “1980년대 초반 군부 정권에 의해 광주에서 벌어진 민중 학살은 시를 쓰는 손이 부끄러울 만큼 시인으로서 정체성 자체를 의아하게 했다”며 “한국의 여러 변혁을 경험하며, 겁쟁이 시인으로 살았지만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했다. 그 괴로움이 남편을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라고 명명한 시 ‘남편’, 역사 속 유관순 열사를 한 명의 여성으로 되살려낸 장시집 ‘아우내의 새’를 비롯해 여성의 언어를 살리는 작품으로 승화됐다.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매혹적인 힘으로 나를 혁명하고 세계를 혁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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