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96] 현대인의 고향
화가 정재호(1971~)가 그린 회현시민아파트다. 창백한 햇살이 외벽 바깥으로 돌출된 창문을 비스듬히 지나쳐 아파트 전면에 조심스레 빗금을 그었다. 가파른 남산 자락에 바짝 붙여 지은 터라 구름다리를 건너 입구로 들어가면 6층이 나오는 특이한 구조다. 1970년 5월 준공 당시에는 개별 화장실과 중앙난방이 구비된 최신식 주택이었지만, 긴 세월을 보내는 사이 벽돌은 색이 바랬고 벽면은 우중충한 얼룩으로 물들었다. 낡고 쇠락한 데다 저층 복도는 해가 거의 들지 않아 ‘친절한 금자씨’와 ‘올드보이’처럼 음산한 스릴러물의 촬영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재호의 그림 속 회현아파트는 음산하지 않고 오히려 다정하다. 집집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개·보수를 거쳐 조금씩 달라진 창문과 베란다에서 지난 50여 년 동안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삶을 일궜던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재호는 2005년 청운시민아파트가 철거된 다음부터 서울시에 산재한 오래된 아파트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눈에 마치 산이나 계곡처럼 변치 않는 풍경인 듯 서 있던 아파트 단지가 순식간에 사라진 광경은 마치 고향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을 줬다. 지난 세기에 태어나 ‘아파트 공화국’에서 성장한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인들에게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라 아파트 동호수다.
정재호의 그림은 그림인 줄 알고 봐도 사진 같다. 그가 최선을 다해 치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정성을 다해야 이들이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아있는 마지막 시민아파트인 이 집도 올해 말 철거 예정이다. 그 뒤엔 이 그림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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