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데시코 재팬’이 짊어진 굴레…축구사 바꾼 월드컵 우승 뒤

박강수 기자 2023. 9. 1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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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수의 스포츠 인사이드]2011년 우승과 2023년 8강, 일본 여자 축구팀의 역사 바꾼 두 번의 월드컵
일본 여자축구 대표팀이 2023년 8월11일(한국시각)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에덴파크에서 열린 ‘2023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여자월드컵’ 스웨덴과의 8강전에서 패한 뒤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기 위해 서 있다. AP 연합뉴스

기호는 고정돼 있지 않다. 비유하자면, 그릇은 같아도 담기는 내용물은 시대의 바람을 타고 변한다. 요컨대 미국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기는 인종차별과 흑인 노예제 옹호의 의미가 담긴 상징물이다. 힙합 뮤지션 카녜이 웨스트는 한때 이 문양을 패션으로 차용해 흑인 입장에서 그 함의를 전복하려 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훗날 카녜이 자신이 트럼피즘(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극단적 주장에 대중이 열광하는 현상)과 반유대주의 음모론의 신봉자가 되고 말았으니, 기호에 본인이 잡아먹힌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데시코’ 구원한 일본 여자 축구대표팀

‘개구리 페페’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만화가 맷 퓨리가 낳은 이 캐릭터는 영미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대안 우파의 간판 ‘밈’(Meme)으로 간택돼 크게 흥행했다. 절망한 작가는 손수 페페의 장례식을 치러 이 불운한 팔자에서 구해주려 했지만,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2019년 여름 민주화운동에 나선 홍콩 시민들이 페페를 상징물로 들고나오면서 판이 뒤집혔다. 그 덕에 페페는 차별과 혐오의 상징에서 민주주의와 저항의 상징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이 목록에 ‘나데시코’(なでしこ)를 보탤 수 있을 것 같다. 나데시코는 일본어로 패랭이꽃을 뜻하는데, 여기에 각별히 고대 일본의 국호인 ‘야마토’(大和)를 붙인 ‘야마토 나데시코’는 일본 자생종을 가리킨다. 일본인은 이 말을 조신하고 참한 이상적 여성상에 빗댔고, 근대를 거치면서 헌신·희생 등 수구적인 여성관이 덧씌워졌다. 가령 ‘위안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활동단체 중 ‘나데시코 액션’이란 곳이 있다. 한·일 양국의 시민 모두에게 곤란한 작명이다.

나데시코를 구원한 것은 ‘나데시코 재팬’, 일본 여자축구 대표팀이다. 2004년 여자축구 부흥을 위한 리브랜딩 프로젝트가 가동됐고, 공모를 통해 대표팀은 ‘나데시코 재팬’이라는 이명을 하사받았다. 그 뒤 이 고유명사의 운명은 영원히 달라졌다.

원년은 2011년이다. 일본 대표팀은 2011 독일 여자월드컵 결승전에서 당대 최강 미국을 누르고 우승컵을 들었다. 이 경기 전까지 일본은 미국과 25번 붙어 한 번도(3무22패) 이기지 못했다. 당시 대표팀 공격수 마루야마 가리나는 어릴 적 일본이 0-9로 깨졌던 경기(1999년)를 보면서 ‘아홉 골밖에 안 먹어서 다행인걸’이라 생각했고, 미드필더 미야마 아야는 “일본은 약했다. 선배들은 재능이 있어 보였는데, 그들이 이길 수 없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문을 두드려, 강호의 패권에 도전장을 내민 그들은 결국 세계 축구사를 바꿨다. 선제 실점(후반 24분) 뒤 따라붙었고(후반 36분), 다시 실점한 뒤(연장 전반 14분) 다시 따라붙었다(연장 후반 2분). 승부차기에서는 미국 키커 셋이 연달아 실축했고, 일본에서 두 번째로 어린 구마가이 사키가 네 번째 키커로 페널티킥에 성공하면서 동화를 완성했다. 당시 상대이던 미국의 메건 러피노는 “일본의 승리는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라고 인정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비교…눈앞의 적을 두고 ‘미래’와 싸운 대표팀

나데시코의 이야기는 불과 넉 달 전 동일본 대지진을 겪고 황폐해진 일본인의 마음을 위무했고, 일본 여자축구의 국제적 위상을 바꿔놓았으나 ‘화양연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축구협회(JFA)는 당장의 인기에 취해 장기적인 발전 청사진을 수립하지 못하며 실기했고, 내실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채 대표팀 성적에만 의존하는 여자축구는 점차 추진력을 잃고 정체됐다. 패배한 팀에 패배 이후가 있듯이, 승리한 팀에도 승리 이후가 있었다.

일본의 우승 멤버는 4년 뒤 2015년 캐나다 대회에서 2연속 결승 진출을 일궜으나 이번에는 미국에 대패(2-5)했다. 이듬해 리우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했고, 2019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16강에 그쳤으며, 2021년 도쿄올림픽 역시 8강에서 패퇴했다. 성적이 떨어지면서 존재감도 옅어졌다. 2021년 프로로 전환한 WE리그의 휑한 관중석은 일상이 됐고, 이번 2023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여자월드컵은 개막 직전까지 중계권이 팔리지 않았다. 소셜미디어에는 이런 글이 나돌았다.

“지금의 나데시코는 약하다.”

2023년의 나데시코 재팬이 처한 현실이었다. 챔피언의 유산이라곤 2011년 그때의 팀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굴레뿐인 듯 보였고, 나데시코라는 이름 위에는 어느덧 일본 여자축구의 부흥이라는 사명까지 얹혀 있었다. 2011년 결승전 승부차기의 마지막 키커였던 구마가이는 지난 세월 나데시코의 내리막길을 한복판에서 지켜본 대표팀 최후의 우승 멤버다. 주장 완장을 이어받은 그는 “여자축구의 미래를 위해 싸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번 대회를 돌아봤다.

일본은 2023 월드컵을 8강에서 마무리했다. 이렇게 요약하고 나면, 그저 안타까운 패배를 면하지 못한 석연찮은 결말처럼 들리겠지만 뜯어보면 얻은 게 더 많다. 일본은 우승팀 스페인에 유일한 1패, 그것도 0-4 참패를 안겼고, 이 승리를 포함해 눈부신 조별리그 전승 페이스(11득점 무실점)를 선보이며 가장 완벽한 경기력으로 세계 축구팬의 마음을 훔쳤다. 다섯 경기만 치르고도 월드컵 역사상 두 번째 일본인 득점왕(미야자와 히나타·5골)을 배출한 점도 흥미롭다.

나데시코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때

연령별 대표팀부터 한 계단씩 밟아온 이케다 후토시 감독의 지도 속에 성공적인 세대교체(평균연령 24.9살)를 이뤘고, 심드렁하던 조국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았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밝힌 16강 노르웨이전(3-1승) 시청자 수는 672만 명으로, 대표팀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이케다 감독의 귀국 일성처럼 “(세계에) 임팩트를 남긴 것도, (우승하지 못하고) 8강에서 탈락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다음 기회로 잇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 방안에 대한 <아사히신문>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계속 우승하지 않으면 축구에 매진하는 여자선수가 없어질 것이다, 그런 마음이 나데시코 재팬에 이어져왔다. 하지만 이제 부담감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선수들이 순수하게 경기에만 집중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WE리그와 일본축구협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박강수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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