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과 용-신선 어우러진 백제 예술의 극치, 금동대향로[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2023. 9. 1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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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대향로(높이 61.8cm). 백제 창왕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탁월한 조형미를 인정받아 백제 예술의 정수로 꼽힌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우리나라의 국보 355건 중 백제 때 만들어진 것은 20건에 불과하며, 그중 12건이 무령왕릉 출토품이다. 백제 700년 역사와 탁월한 문화 수준을 생각한다면 백제 전시기의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국보가 이토록 적다는 점은 매우 의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계일학과도 같은 존재가 있어 그러한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으니 백제 금동대향로가 그것이다.

이 향로는 1993년 발굴된 이래 백제문화의 정수라는 평가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이 향로를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다. 이 향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왔고 그것에는 백제사의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

주차장 만들려다 찾은 백제 보물

충남 부여군 능산리에는 백제 왕릉원이 있다. 백제 도성을 감싼 나성 밖에 위치하며 그곳에는 주인공을 특정하지 못한 여러 기의 왕릉급 무덤이 분포한다. 1990년대 초 정부가 추진하던 ‘중서부 고도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나성과 왕릉원 사이의 계단식 논에 주차장을 만들기로 하였는데, 그곳에 유적이 분포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1992년 예비 조사를 벌였고 유적의 존재가 확인됐다.

1993년 10월, 두 달 정도면 유적의 성격을 밝힐 수 있으리라 예상하고 발굴에 착수했으나 조사가 만만치 않았다. 골짜기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더하여 논바닥 아래에 고여 있던 물이 솟아나면서 발굴 현장은 물구덩이로 변하기 일쑤였다. 12월에 들어섰는데도 겨우 3동의 건물 터 윤곽만 조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12월 12일, 그간의 ‘부진’을 털어내는 위대한 발견이 있었다. 나중에 공방 터로 밝혀진 건물터 내 자그마한 구덩이 안에서 백제 최고의 보물이 발견된 것이다. 향로 뚜껑과 받침 일부가 모습을 보인 것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짧은 겨울 해가 이미 서산에 걸려 있었기에 조사를 중단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혹시라도 밤에 누군가가 유물을 도굴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조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조사를 마치고 향로를 구덩이 밖으로 들어낸 것은 오후 9시가 다 돼서였다.

용이 떠받치고 있는 이상의 세계

조사를 담당한 부여박물관 측은 향로 발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보존 처리를 진행하는 한편 그것의 연대와 성격 해명을 위한 기초 연구를 진행했다. 12월 22일, 문화체육부 장관이 직접 부여박물관으로 내려와 긴급회의를 주재했는데,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이튿날 ‘1400년 전 백제 금동향로 출토’ ‘진흙에서 건진 백제 예술혼’ 등의 제하로 향로 발굴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1937년 부여에서 발굴된 산수무늬 전돌(길이 29.5cm)의 일부. 연속적으로 이어진 산봉우리가 금동대향로의 산봉우리 모습과 유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향로는 높이 61.8cm, 무게 11.8kg으로 큼지막하고 향로를 구성하는 여러 문양이 완벽한 구도를 이루며 배치돼 있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맨 꼭대기엔 두 날개를 활짝 펴고 가슴을 앞으로 쭉 내민 봉황이, 그 아래엔 옷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채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다섯 명이 있다. 뚜껑에는 일흔네 개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고 산봉우리와 골짜기에는 열일곱 명의 신선, 마흔두 마리의 동물이 있다. 향로 몸체의 연꽃 꽃잎에는 스물일곱 마리의 동물, 신선 두 명이 있고 그 사이로 새가 날고 있다. 맨 아래엔 용 한 마리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 향로는 1994년 4월 18일부터 2주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일반에 공개됐는데,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전시 팸플릿과 포스터가 순식간에 동이 났고, 심지어는 전시실 입구에 붙여놓았던 포스터를 관람객이 떼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성왕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나

1994년 4월부터 7월까지 향로 발굴 유적에 대한 추가 조사가 진행돼 강당 터가, 이듬해 5월부터 10월까지 실시한 조사에서는 중문 터, 목탑 터, 금당 터가 차례로 드러났다. 특히 목탑 터에서는 탑 중앙에 세워졌던 기둥 조각과 함께 불사리가 봉안되었던 석제 사리감(舍利龕)이 발견됐다. 사리기는 도굴되어 남아 있지 않았으나 사리감에는 향로 탄생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백제 창왕 13년에 왕의 누이인 공주께서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놀라운 내용으로, 이 절은 창왕, 즉 위덕왕이 누이와 함께 관산성 전투에서 비명횡사한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임을 밝히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 이후 이 절터는 ‘능산리고분군 건물터’에서 ‘능산리 절터’ 혹은 ‘능사(陵寺) 터’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동제 받침 갖춘 은잔(높이 15cm). 용과 봉황, 산봉우리 등이 정밀하게 새겨진 이 작품은 금동대향로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백제의 기술력을 보여준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그 무렵 금동대향로가 성왕의 넋을 기리는 의식용으로 특별 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나와 지금까지 통설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다만,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이 향로를 중국산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우리 학계에서는 중국의 6∼7세기 향로 가운데 백제 금동대향로처럼 크고 정교한 사례가 없다는 점, 백제산이 분명한 무령왕릉 동탁은잔과 부여 외리 문양전에서 금동대향로와 유사한 디자인 요소가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며 금동대향로가 백제산임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의 한 연구자가 우리 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 금동대향로가 백제문화의 개방성과 우수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금동대향로가 수조 터에서 발견된 이유에 대해서는 향로가 망가져서 수리하려다가 사정이 생겨 그대로 묻었다고 보거나 660년 백제가 패망의 위기를 맞자 나라의 보물이던 이 향로를 땅속 깊은 곳에 숨겼을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후자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올겨울이면 금동대향로가 발굴된 지도 만 30년이 된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연구의 진척이 더딘 편이며 여전히 수많은 수수께끼가 금동대향로를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장차 더 다양한 관점과 더 정치한 연구를 통해 금동대향로가 품고 있는 백제사의 비밀이 차례로 해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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