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토론’ 홍일식 前 고려대 총장 별세
13대 고려대 총장을 지낸 가석(可石) 홍일식(洪一植) 박사가 11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양정고 교사로 취직했다가 ‘혁명 실업자’가 됐다. 1961년 5·16 직후 비상계엄 시절, “4·19 때인 줄 아느냐”고 빈정대던 경찰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던 4·19를 모욕하는 태도를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교사를 그만두고 국문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최남선, 조지훈, 구자균 등을 사사한 그는 문학을 넘어 ‘문화’ 이론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1980년대 당시 김상협 총장에게 “민족문화연구소 내에 한국어문화연구소를 만들자”고 건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한국말만 가르치면서 먹고사는 시대가 옵니다.”
군사 주권, 산업 주권 시대에 이어 ‘문화 주권 시대’가 온다는 ‘문화영토(Cultural Territory)론’을 통해 문화가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가 올 것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퇴임 후에도 (재)문화영토연구원을 열어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연구해왔다.
홍 전 총장은 지난해 기자와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식민지 시절, 억울해도 참고 교육과 산업을 일으키자는 근대파가 있었고, 해외로 망명해 강경 투쟁하는 노선이 있었다. 이것이 합쳐져 오늘의 대한민국이 생겼다. 양시론을 가져야지 한쪽이 한쪽을 배척하는 건 위험하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1978∼1992), 13대 총장(1994~1998)을 지냈고, 중한대사전을 편찬했다. 훼절로 배척받는 육당의 처지를 애통해하며 ‘육당 최남선의 친일 시비에 관한 고찰’을 썼다. 유족은 딸 혜정(서울 종로구보건소장), 아들 성걸(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성업(주 코프란 회장), 성구(경북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103호, 발인은 9월 14일 오전 7시. (010)5291-4439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