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엔 “수요시위 보호를” 이번엔 “우선 보호 안 돼”…점점 ‘우로 가는’ 인권위
수요시위 보호 요청도 기각
인권활동가 “독립성 흔들려”
윤 정부 ‘코드 맞추기’ 비판
국가인권위원회가 수요시위 현장에서 극우단체의 혐오발언 등 인권침해를 막아달라는 집회 주최 측 진정을 기각한 것을 두고 인권·시민단체들이 “인권위가 인권을 수호해야 할 본연의 역할을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박정훈 해병대 대령에 대한 긴급구제 신청을 기각한 데 이어 수요시위 주최 측의 진정을 기각한 것을 두고 독립기구인 인권위가 윤석열 정부와 코드를 맞추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용원 인권위 침해구제제1위원장은 정의기억연대가 제출한 위안부 수요시위 보호요청 진정을 기각했다고 지난 8일 밝혔다. 지난달 1일 개최된 제8차 침해구제제1위원회의에서 인권위 사무처는 보호요청을 인용하자는 안건을 제출했으나 최종 표결에서 부결됐다. 표결에는 3명의 위원이 참가했다. 김용원 위원장을 포함한 2명은 “특정 집회를 국가가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것과 특정 집회에 반대하는 집회를 사전에 억제하는 조처를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며 기각 입장을, 김수정 위원은 인용 입장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기각 결정 이후 인권위 내부에서 잡음이 이어졌다. 김 위원은 당시 회의에서 인권위법을 위반해 의사결정이 이뤄졌다고 사무처에 문제를 제기했다. 인권위법 제13조 제2항은 “소위원회 회의는 구성위원 3명 이상의 출석과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2명의 의사일치만으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사무처는 지난 8일 입장문에서 “김 위원의 문제제기 후 위원 간 재논의 등 해결 방안을 모색했으나 위원장이 재논의를 거부했다. 또 해당 사안을 기각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안건들의 후속절차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기각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인권활동가들은 인권위가 혐오표현을 제지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11일 통화에서 “보수단체의 맞불집회는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수요시위를 방해하기 위해서 진행되는 것이 명백하므로 이들의 집회를 제한한다고 해서 집회의 자유가 훼손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노골적으로 집회·시위를 방해하는 걸 방관하는 일은 국민 인권의 호민관 역할을 하는 인권위로서 적절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는 “위안부 문제는 국내뿐 아니라 유엔인권이사회 등 국제사회에서도 이미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로 규정된 사안임에도 반대집회 측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혐오발언을 일삼아왔다”며 “형식적 법 논리가 아닌 국제인권기준에 맞는 판단을 내려야 할 인권위가 인권에 대한 검토를 충분히 하지 않고 기계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했다.
이번 기각 결정은 과거 인권위의 입장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인권위는 지난해 1월 “수요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모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며 종로경찰서장에게 긴급구제를 권고했다. 맞불집회 주최 측에 집회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도록 적극 권유하고,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할 경우 수사에 나서라고도 했다.
당시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수요시위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시민사회가 그 책임을 묻는 세계사적으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운동”이라며 “단순히 (수요시위와 맞불집회) 두 개의 보호받아야 할 집회를 어떻게 조정할지로 접근하기 어렵고,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세계 최장기 집회를 어떻게 보호해야 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는 게 인권의 기본원칙에 부합한다”고 했다.
박한희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수요시위는 반대집회 측에 의해 계속 집회 장소를 뺏기고 방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번 결정으로 수요시위 참가자를 향한 혐오발언이 방치될 경우 단순히 위안부에 대한 왜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혐오와 증오가 만연해질 우려가 있다”고 했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국가인권기구에서 제일 중요한 건 독립성이다. 그런데 지금 여당에서 추천한 내부위원들이 기존 인권위의 판단기준을 허물려는 시도를 해 우려스럽다”며 “단순히 정부의 눈치를 보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코드를 맞추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인권위의 결정 자체가 무력화되는 것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세훈·윤기은 기자 ksh371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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