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윤석열 정부의 연금개혁, 저비용 자본주의와의 이별
한때 저임금 노동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생존방식이었으며, 복지 역시 비용 억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저비용은 이제 경쟁력의 요체가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게다가 저비용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노동과 혁신에 기반한 자본주의로, 구성원에게 적정 임금과 괜찮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하는 체제로 나아가는 게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한 유력한 경로다. 21세기 복지국가의 길이다.
한국의 노후보장, 국민연금 개혁의 핵심도 다르지 않다. 국민연금이 초고령사회에서 노후보장제도로 제 역할을 하려면 지금의 보장수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급여수준을 올리지 않고는 앞으로 수십년 내내 국민연금 급여는 생활 불가능한 낮은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더 오래 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출산, 군복무 크레딧 확대와 같은 가입기간을 늘리는 전략만으로는 미흡하다. 자본주의 국가 중 한국 국민만 유독 부동산, 주식, 개인연금으로 각자도생해 안정적인 노후를 영위할 재주는 없다. 이렇게 국민연금에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이 필수적이라면, 남은 문제는 어떻게 ‘적정 비용’을 실현할 것인가이다.
얼마 전에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공청회 보고서가 제시되었다. 윤석열 정부 연금개혁의 첫 번째 밑그림이라 할 만하다. 보고서는 2093년 재정안정을 목표로 18개의 재정확충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하지만 그사이 70년간 펼쳐질 초고령화 과정에서 노후보장을 강화하기 위한 핵심 방안은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쪽짜리’ 보고서로 불렸다. 더욱이 기초연금 대상 축소 방향도 제시됐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적정 보장’ 이슈를 간과했다는 것만큼이나 ‘적정 비용’을 실현하는 장기 방안에도 문제가 있다. 보고서의 국민연금 재정에 대한 관점과 방안은 보수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이 보고서에서 제시한 시나리오는 과연 작동할 수 있을까?
보고서는 국민연금 재정확충 수단으로 보험료율을 높이고, 연금 수급 연령을 늦추고, 기금 수익률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가입자가 보험료를 더 내고, 더 늦게 은퇴함으로써 재정 책임을 더 많이 지고, 국민연금기금의 더 큰 투자 위험을 감수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단기가 아닌 장기 재정방안을 설계한다면, 지금의 연금재정 틀을 넘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핵심은 가입자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용자의 국민연금 재정책임을 함께 확대하는 것이다. 매일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노동력을 팔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소득공백 시기를 예정하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은 소득절벽에 처한 이들에게 사회보장을 해야 사회가 파국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에서 체득했다. 노후보장 비용 확대 국면에서 은퇴 후 적정노후 보장을 위한 국가와 사용자의 재정책임 확대는 필수적이다.
우선 보험료를 올릴 때 노동자와 사용자의 분담 비율을 조정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공적연금 보험료는 평균 15%를 넘는데 이 중 사용자 부담 비중은 약 70%이다. 또한 국가의 국민연금에 대한 재정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독일·프랑스·스웨덴 등 규모가 큰 사회보험 방식 연금에서는 국가가 다양한 형태로 상당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 셋째, 국내총생산(GDP)의 30%에 못 미치는, 제한된 근로소득인 국민연금 보험료 부과 기반을 자산소득 등으로 넓히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직후 법인세 인하를 단행했다. ‘K칩스법’으로 투자 세액공제도 늘렸다. 광복절 특사에서 기업인을 사면했다. 정부가 저비용 자본주의에 대한 고별을 공식화하고, 기업에 국민연금 비용 조달을 위한 제대로 된 청구서를 발행할 수 있을지, 가입자와 함께 국가와 자본의 연금재정 책임 확대를 실현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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