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뽀개버리고 갈아버릴’ 리더십의 귀환
양당체제와 현 정치판을 비판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육성 전화음성이 보도됐다. 거대 양당체제에 신물이 난 제3지대 시민들의 개혁 열망과 무채색 관료주의에 호소하는 통화로 인식될 듯싶다. 때 묻지 않은 손으로 정치해야 한다는 ‘결벽주의’와 ‘반카르텔론’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하지만 다원주의 체제에서의 권력은 연대하는 세력들이 덧대고, 더하고, 공존하고, 때로는 공유하는 그런 것이다. 덕지덕지 기운 스님의 가사장삼처럼 덧댄 거버넌스, 그것이 바로 다원주의 민주주의다. 이런 다원주의 권력은 선과 악으로 갈라지지도 않고 흑백으로 나누어지는 경계도 없다. ‘뽀개버리고 갈아버릴’ 이분법이 설 자리가 없는 다원주의 리더십의 실체이다.
전통적 권력론은 특정 세력이 다른 세력들을 지배하고, 여러 군상들을 내려다보며 통치하는 수직관계의 도구적 권력을 전제한다. 이런 권력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연대, 즉 공존과 공유의 수평적 규칙을 만드는 거버넌스적 권력이란 환상일 따름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도덕성, 위와 아래를 나누는 효율성, 과정보다 결과의 논리에 익숙한 효과성, 이 모든 이분법은 전통 권력이 강조하는 덕목이다.
촛불 정부가 꿈꿨던 권력은 새로운 연대를 향한 다원주의 리더십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신속한 의사결정권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엘리트들이 보기에 지난 정부의 권력 프로세스는 더디고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러 세력이 수평적으로 연합해서 만든 이런 연대의 권력은 정당성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확장성만큼이나 느려 터져 보이게 마련이다. 이념적 대의가 분명하지 않은 답답하고 무능한 ‘반대론자’들의 연대로 비쳤기에 이권 카르텔이란 비아냥도 등장했다. 촛불 정부는 전통적 권력 바깥에 자리잡아온 대안 세력을 초청했지만 ‘주변부 세력’에 대한 기득권의 반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태극기 부대는 참여연대, 민주노총, 조국, 윤미향 등을 ‘21세기의 적들’을 상징하는 용어로 치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착시를 더 강화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화해와 협력이라는 평화주의 국제관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다.
육성 통화는 여기가 출발점이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흐른 지금 윤석열 정부는 야당과의 전투를 격려하는 ‘독전’의 리더십, 장관들이 모두 전사가 되기를 바라는 영웅주의 ‘서사’를 설파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제 다원주의와 결별하고, 이념 공동체의 좌표로 전환되었다. 음각으로 음미돼 왔던 자유주의를 양각으로 조각하자며 반 ‘공산전체주의’라는 불상의 주적관을 호명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오펜하이머를 옥죄던 매카시즘 시대의 청문회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념의 깃대는 공동체의 기억도 재해석하고자 한다. 공존하고 공유하는 기억이 아니라 정치 기획에 걸맞은 역사 기록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 애꿎은 홍범도 장군이 곤욕을 치르고 있고, 건국절 논란이 재소환됐다. 전사가 된 국방부 장관의 변심에 해병대 수사단장은 보직 해임과 항명에 내몰려 있기도 하다.
육성 통화의 표현이 상스러우냐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 육성에서 느껴지는 강한 진정성이 오히려 문제이다. 확신에 찬 기획자의 의지가 가져올 이분법과 갈등의 미래가 안타까운 것이다. 현재 권력이 여야 정치세력을 뽀개고 갈아버린다고 해서 정치문화가 단기간에 바뀔 리가 없고, 이분법적 정치문화가 지배하는 한 무늬만 새로운 정치판은 계속될 것이다. 역사와 이념을 동원해 상황을 통제한다지만 이익을 좇는 철새들의 이합집산은 계속되고 이념 전쟁의 상흔만 가득할 것이다.
데이터와 다원적 정치변동 이론에 근거하지 않는 저잣거리 술판의 정치 기획이 판형을 바꾼다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문재인 정부의 주택 정책이 수요 관리라는 단일 정책 때문에 실패했다고 비아냥대지만, 부동산 정책의 변수는 수요·공급의 단순 이항대립만이 아니다. 지금도 정책 회임의 장단기 차이, 주택 멸실과 내구력 차이, 인구 문제 변동에 따른 수급 차이, 기준금리와 조달금리 차이 등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심지어 글로벌 정세에 따른 환율과 국채전쟁에 따른 채권 자금 향배, 나아가 ‘영끌’하는 참여자들의 욕망 등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다원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21세기 리더십이 되기는 어렵다. 의원들의 지적질이 듣기 싫다고 장관들이 냅다 싸움만 하다보면 확증 편향에 빠져 변화와 성찰의 기회를 놓치기 마련이다. ‘부수고 뽀개서’ 얻은 권력이란 게 결국 국민들을 부수고 뽀개 놓는다면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를 연 20세기 사기극과 뭐가 그리 다를 텐가?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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