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대통령의 ‘가짜’ 이념 전쟁
“일본이 100년 전 일어난 일 때문에 (용서를 빌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2023년 4월24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그런 윤석열 대통령은 100년 전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가입 전력까지 문제 삼는 이념전을 벌이고 있다. 그만큼 윤 대통령의 ‘이념 집착’이 도드라진다. 그는 지난 8월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해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며 “분명한 철학과 방향성 없이는 실용도 없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반국가 세력에 맞서는 ‘자유민주주의 투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이념전은 몇 가지 점에서 혼란스럽다. 일관성이 떨어진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새 정부에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이념이 아닌 민생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정부의 의사결정도 이념이 아니라 실용과 과학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그간 ‘과학’을 강조하며 이전 정부를 ‘이념’ 정부로 몰아세워왔다.
모순적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이념을 자유민주주의로 상정하고 자유·인권·법치를 강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들을 후퇴시키는 조치를 하고 있다. 그는 한·미·일 보편적 가치 연대를 말하지만 정부의 방향은 이와 거리가 있다. 정적 탄압, 언론자유 제한, 사회적 약자 억압, 역사해석 독점에 골몰하는 모습은 북·중·러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윤 대통령의 진짜 이념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과 노무현 대통령의 원칙”을 추켜세우고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까지 했으면서 이전 정부를 ‘반국가 세력’으로 모는 이념이란 무엇일까. 확고한 이념은 정치·사회적 활동이나 지적 활동을 통해 형성된다. 그의 이력은 이념과 거리가 있다. 평생 검사로 살면서 이념을 조탁할 삶의 궤적을 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의심받는 뉴라이트 역사관도 오랜 사상적 고민의 결과라기보다 ‘늦바람’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을 보면 체계적인 역사전쟁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내지른 후 수습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윤 대통령의 이념전을 다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경제에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라며 “북한도 1990년대에 ‘쌀밥에 고깃국’이 최우선 과제였는데 그것을 못하니 강성대국이나 핵보유국 등 다른 수단으로 간 것”이라고 했다. 경제나 민생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윤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불안감 때문에” 수세적으로 이념을 꺼냈다는 지적이다. 유인태 전 의원은 “잘하려고 하는데 지지도가 안 오르는 것에 대한 원망이 좀 섞여 있는 게 아닌가”라고 했다. 그는 “그 원망이 날 지지하지 않는 놈들은 반국가 세력 아니야? 이런 거 아닌가”라고 했다. 낮은 지지율에 대한 좌절감이 이념전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경제는 좀체 회복될 기미가 없고, 대통령이 잘 못한다고 보는 과반의 여론은 콘크리트화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이념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윤 대통령은 ‘가짜’라는 말을 즐겨 쓴다. 가짜 뉴스, 가짜 평화, 가짜 민주주의 운동가, 가짜 인권운동가. 윤 대통령식 표현에 따르면 지금의 이념전은 ‘가짜’ 전쟁이 아닐까.
강병한 정치부 차장 silverm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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