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역 여성살해 1년, 지하철도 스토킹도 바뀐 건 없었다

2023. 9. 1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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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피해자, 여전히 위험…역무원 2인1조도 사실상 불가능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여성 역무원이 근무 중 스토킹 가해자에게 살해당한 '신당역 스토킹 살해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났다. 사건 당시 정부와 관계기관은 역무원 2인1조 근무확립, 스토킹처벌법 강화 등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았지만, 현장에선 역무원의 안전도 스토킹 피해자의 안전도 "변한 게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운수노조, 서울교통공사노조 등은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당역 살인사건 이후) 정부의 대책은 개인적인 처벌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 사업장의 안전을 위한 근본적인 안전대책은 미비한 상황"이라며 이 같이 밝혔다. 노조는 지난 4일 '신당역 살인사건 피해 노동자 1주기 추모주간'을 선포, 오는 14일까지 추모공간 마련 등 공동행동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9월 14일 발생한 신당역 살인사건은 산업재해와 젠더폭력의 성격이 뒤섞인 '직장 내 성폭력·살인 사건'이었다. 피해자의 전 직장동료였던 가해자 전주환(32) 씨는 사건발생 1년 전부터 피해자에게 스토킹과 불법촬영 및 유포 협박 등의 범죄를 일삼아왔으며, 해당 범죄들로 인한 소송 중 끝내 피해자를 보복 살해했다. '페미사이드(여성살해)'의 대표적인 징후로 꼽히는 스토킹 범죄가 직장 내에서 1년가량 지속됐지만 회사도, 수사·사법기관도 피해자를 지키지 못한 셈이다.

'젠더산업재해'였던 신당역 사건, 1년 지났지만 역무원 노동환경은 "그대로"

노조는 특히 사건 당시 지적됐던 서울교통공사 내 시스템이 사건 이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근로복지공단이 지난해 신당역 살인사건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지만 공사의 자체 규정엔 큰 변화가 없었고, 직장 내 성폭력을 규정하고 있는 관계법령들도 '위계'나 '업무관련성' 등 법 적용에 관한 한정적인 범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특히 사건 당시 피해자는 조직 내 2차 피해 등을 우려해 스토킹 및 불법촬영 사실 등을 공사에 알리지 못했다. '성폭력 피해자 및 신고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 금지'가 법적으로 규정돼있음에도 당사자는 그 실효성을 느끼지 못한 셈이다. 이에 노조를 중심으로 "사내 매뉴얼 강화를 통해 사용자의 적극적인 의무 이행을 유도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었지만, 공사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은 여전히 개정되지 않은 상태다.

이날 현장을 찾은 현정희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은 "(당시 피해자가 회사에 피해사실을 알리지 못한 이유는) 공사의 젠더폭력 대응체계와 피해자 보호 제도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며 "많은 여성 노동자가 일터 내 성폭력을 경험하여 신고해도 10명 중 9명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교통공사노조 등이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신당역 살인 사건 1년, 현장은 그대로다'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실제로 지난해 서울교통공사노조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사내 성폭력 피해 사례를 모니터링한 결과,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의 집에 찾아와 몸싸움을 벌인 경우 △가해자의 가족(형수)이 근무지 역사에 찾아와 선처·합의 등을 종용한 경우 등 다양한 방식의 2차 피해 양상이 신고된 바 있다. 당시에도 노조는 "사내 성폭력 대응 프로세스에 대한 점검과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 "가해자가 집까지 찾아왔다"... 또다른 '신당역 사건' 있었다)

피해자는 전부터 역무원 안전문제로 지목돼오던 '나홀로 근무' 중 사망하기도 했다. 서울교통공사와 서울시는 사건 이후 2인 1조 근무 확행 및 지침·메뉴얼화로 해당 안전문제가 해소됐다고 주장하지만, 이날 노조에 따르면 "(역무원 대상) 설문조사 결과 신당역 사건 이후 여전히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2인 1조 근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노조 설문조사에 응한 1055명의 역 직원 중 93.55%는 신당역 사건 이후 '2인1조 문제가 해소됐는가' 묻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했다. 공사는 안전보호장비 지급 등을 재발방지 대책으로 내세우기도 했지만,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60%는 해당 장비들이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노조는 "결국 근본적인 대책은 안전근무를 가능케 하는 인력충원"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시와 공사는 지난해 1539명이던 인력감축안을 올해 2212명으로 오히려 확대했다.

명순필 서울교통공사노조 위원장은 서울시와 교통공사의 '2인1조 확행 매뉴얼'에도 불구 "역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회사의 지시와 지침대로 (2인1조) 근무를 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라며 "회사는 지시와 지침, 매뉴얼을 내어 놓은 것으로 책임을 또 다시 회피했다. 나아가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지시와 지침,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직원 탓을 할 수 있도록 책임을 전가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교통공사노조 등이 1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신당역 살인 사건 1년, 현장은 그대로다'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스토킹처벌법 강화됐지만 … "피해자보호 사각지대 여전해"

스토킹 범죄에 대한 제도보완은 어떨까. 신당역 사건 이후 1년 동안 정부와 국회는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을 개정하고 스토킹피해자보호법을 신설하는 등 나름의 제도보완에 나섰다. 이전 스토킹처벌의 대표적인 맹점으로 꼽혀오던 반의사불벌죄 조항 역시 삭제된 상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법 개정은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과연 이런 변화들이 실질적으로 스토킹 피해자들에게 와 닿을지에 대해서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직장갑질119 젠더폭력대응팀에서 활동 중인 강은희 변호사는 이날 기자회견 현장을 찾아 "법 개정으로 스토킹처벌법의 스토킹 행위 유형에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스토킹이 추가됐지만, 법은 여전히 스토킹 행위를 한정적으로 열거하고 있다"며 "새로운 유형의 스토킹에 법은 언제나 취약하다. 스토킹 처벌법의 스토킹 정의 규정을 스토킹 행위의 본질에 맞게 포괄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범죄현장엔 한두 가지의 처벌규정 신설만으론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스토킹 피해가 산재해 있다. 민변 소속 박인숙 변호사는 지난해 10월 열린 '신당역 여성살해 사건을 통해 바라본 스토킹처벌법과 여가부의 역할' 토론회에서 △위치정보 수집 △온라인 게시물 게시 △피해자나 주변인 사칭 △해킹 시도 및 해킹 △온라인 감시 △피해자 명의 금융서비스 신청 △가족이나 동거인이 아닌 지인에 대한 접근 △반려동물 등에 대한 위해 행위 등을 스토킹 사각지대의 예로 든 바 있다. 대부분 개정 스토킹처벌법으로도 막기가 어려운 사례들이다.

스토킹 피해자 보호 또한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다. 지난해 11월엔 대구에서 한 남성이 스토킹 신고를 당하고도 피해자를 찾아가 피해자의 아들을 살해하고 피해자를 납치·감금한 사건이 벌어졌고, 올해 7월엔 인천에서 스마트워치까지 지급 받았던 스토킹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모두 법원이 접근금지 명령을 내린 경우였다.

강 변호사는 "잠정조치는 최장 9개월까지만 가능하여 여전히 피해자를 보호하기에는 부족하다"라며 "무엇보다 법은 여전히 잠정조치에 대한 피해자의 직접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검사를 통한 청구권만을 인정해 여전히 피해자 신변보호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 달 30일 스토킹 등 고위험군 범죄 피해자에게 민간 경호원을 배치하는 보호대책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실효성에 대한 지적은 잇따르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8월 논평에서 "스토킹의 가해자는 (전)애인‧데이트 상대자가 35.1%, (전)배우자 14.4%, 친족 11.7%, 직장 관계자 11.2% 순으로, 평소 밀접한 생활반경을 공유하는 관계 유형이 전체의 72.4%를 차지했다"라며 "가해자를 격리하지 않은 채 피해자의 '실외' 활동 시에만 이뤄지는 민간 경호는 과연 무엇을 보호할 수 있는가"라고 주장했다.

스토킹피해자보호법이 지자체에 스토킹 지원시설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강 변호사는 이에 대해서도 "7월 말을 기준으로 장기와 단기 전용 시설을 갖춘 지자체는 부산과 전남 두 곳뿐"이라며 "아직 충분한 보안을 제공하는 피해자 전용 시설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11일 오전 서울지하철6호선 신당역 10번 출구 인근에 마련된 추모공간. 누군가가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는 내용의 추모 메시지를 붙여놓았다. ⓒ프레시안(한예섭)
▲'역무원 스토킹 피살 사건'이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지난해 9월 20일 오전 한 시민이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아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사기관, 사법기관, 사업주 모두가 '스토킹 위험성' 인지해야

결국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신속하고 물리적인 격리조치만이 피해자 보호를 위한 실효적인 방책이 될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수사·사법기관과 함께 스토킹 범죄가 벌어지는 '현장' 중 하나인 사업주 측이 "스토킹 범죄의 중대함과 고위험성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프레시안>과의 지난 인터뷰에서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크다"라며 "스토킹은 살인으로 연결될 수 있는 범죄이기 때문에 초반에 강력하게 공권력이 개입해야 하는데, 접근금지명령 등의 표면적인 조치 이후 사실상 가해자를 방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김세정 직장갑질119 공인노무사는 '신당역 여성살해 사건을 통해 바라본 스토킹처벌법과 여가부의 역할' 토론회에서 "현행 스토킹처벌법상 스토킹 정의는 친밀한 관계 또는 불특정 다수에만 초점을 두고 있어, 업무적 관계가 있는 자들(고용주, 상급자, 동료, 고객 등)의 스토킹에 회사의 조치 의무를 강제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회사에 스토킹 피해자 보호 조치와 신고를 이유로 한 불리한 처우 금지 의무를 부과하고, 더 나아가 현행법상 응급조치 의무 일부를 부과하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신당역 사건 1주기 추모주간 주최 측은 이날 오전부터 서울지하철6호선 신당역 10번 출구 앞에서 피해자 추모를 위한 추모공간을 운영한다. 헌화 및 추모 메시지 부착을 원하는 시민들은 오는 14일까지 해당 추모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11일 오전 서울지하철6호선 신당역 10번출구 인근에 설치된 신당역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공간 ⓒ프레시안(한예섭)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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