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의 부끄러운 뿌리 찾기
[똑똑! 한국사회][윤 정부 ‘역사 쿠데타’]
[똑똑! 한국사회] 방혜린 |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나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와 달리 경남 진해에 위치한 우리 학교는 물리적인 위치로 인해 대학으로써 교육 시설과 인프라가 집중된 수도권의 이점을 누리기 어렵다. 이러한 탓에 우리는 종종 서울의 유명 대학과 학점 교류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육사를 부러워했다. 부지를 단독으로 쓰며 웅장함을 뽐내는 육사의 시설에 비해 진해 해군기지 내 한쪽 구석에 자리한 채 낡은 건물을 개조해 쓰던 우리 학교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해사 생도에겐 육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자부심의 근원이 있다. 바로 해군과 해사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 제독의 존재이다. 손 제독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냈던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로, 자신 역시 중국 길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조선 해군을 창설하고자 중국 해군부에 들어가 훈련받았으며, 1934년 임시정부 군자금 마련과 무장투쟁을 위해 평양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 제독은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고, 1946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지냈다.
해사에서는 해군 창설과 손원일 제독에 대해 자세히 교육하고 기념한다. 해군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생도들에게 체화시키기 위해서다. 학업과 품행이 우수한 생도에게는 ‘손원일상’이 수여된다. 손원일함은 장보고-Ⅱ 사업을 통해 건조된 잠수함의 선도함이 됐고, 이 잠수함 클래스에 안중근, 김좌진, 이범석, 유관순 그리고 홍범도함이 포함되어 있다. 해군의 발전과 위상을 대표하는 잠수함에 독립영웅의 이름을 따 명함으로써 해군의 뿌리가 항일독립투쟁에 있다는 자부심을 되새기는 것이다.
한편 1946년 창설된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육사의 ‘뿌리 찾기’는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진행되었다. 육사는 그해 12월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운동과 육군의 역사’라는 특별 학술대회 개최를 통해, 신흥무관학교와 육사의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존재함을 주장했다. 당시 박일송 육사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신흥무관학교 등의 무관학교들이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육사의 정신적 정통성의 연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흐름은 윤석열 정부 들어 “한-미 동맹에 기반한 국군의 뿌리를 바꾸기 위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조치”라고 해석되기 시작했다. 지난 8월31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현 정부의 흉상 이전 계획은 전임 정부가 남북 관계를 고려해 치밀하게 군의 정체성을 바꾸려고 했던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정상화 조치라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군 활동의 어느 지점을 친북적이라 해석할 수 있고, 항일무장투쟁이 어째서 한-미 동맹의 가치와 배치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혹시, 한·미·일 군사협력이 강화되는 판국에 ‘항일’이라는 가치가 좀 불편한 것일까?
지나온 역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지키는 일은 후세의 역할이다. 이름을 제외하곤 가족도, 재산도 남기지 못한 채 조국도 없이 떠돌아야 했으나 누구보다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고 전투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운 독립투사보다, 공산당 때려잡기에 진심이었으나 같은 동포를 때려잡는 것에도 진심이었던 친일 군인 집단이 육사와 육군에 적절한 뿌리라고 판단했다면 이를 계속 고집했으면 될 일이다. 결국 정권의 지시라는 명목으로 여기저기 뿌리가 흔들린다는 건 육군의 근간과 건군 이념에 대해 육군 역시 낯부끄러워하는 지점이 있고, 그것을 아킬레스건처럼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홍범도함 명칭을 변경하도록 총리와 장관이 압박을 가하는 가운데 해군은 아직 단호히 버티는 중이다. 명칭이 끝내 변경되더라도 해군엔 이를 반대한 역사가 남는다. 뿌리란 이런 힘을 가진다. 육사도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참에 흔들리지 않도록 뿌리를 제대로 내리길 바란다. 그 뿌리가 어떤 힘을 줄지, 이번에는 부끄럽지 않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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