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이 된 후안무치
[뉴스룸에서]
[뉴스룸에서] 이재명 | 기획부국장
거침없는 퇴행이다. 한순간에 독립운동가는 일개 볼셰비키로 전락했고, 오염수 방류는 참칭된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훈풍이 불던 남북관계는 삭풍이 거세고 균형외교는 사대외교로 회귀했다. 정부 비판은 ‘반국가 범죄’로 겁박당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자유민주주의, 법치를 부정하는 법치의 시대다. 역사가 다시 쓰이고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는 데 1년 반이면 충분했다.
한번 시작된 붕괴는 걷잡을 수 없다. 이념이나 진영과 거리가 먼 도덕과 윤리도 예외가 아니다. 공직자의 권위는 그 지위와 직책에서 나오지 않는다. 공직자가 윤리를 내면화했을 때 비로소 그 ‘영’이 선다. 그러나 애써 일궈온 공직자의 도덕 기준은 속절없이 후퇴했고 공직윤리 제도는 형해화됐다. 이 정권 사람들은 대놓고 뻔뻔하다. 감췄다가 들키면 “몰랐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몰랐다”는 “기억나지 않는다”와 함께 ‘법 기술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그렇다. 2009년부터 십수년간 재산 신고를 해온 판사가 비상장주식이 신고 대상인 줄 몰랐다는 변명을 누가 곧이듣겠는가. 심지어 이 후보자와 가족은 그 주식 배당금으로 매년 수천만원을 받았다. 소득의 증감은 재산 변동 신고에서 핵심인데도 배당소득의 원천인 비상장주식을 빠뜨렸단 게 말이 되는 해명인가.
그의 거짓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후보자는 2018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안성시장 후보자가 채무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다며 당선무효형을 선고했다. 고의로 재산 신고를 누락한 행위를 허위사실 공표라고 본 것이다. 그가 당시 쓴 판결문의 일부다. “공직자윤리법이 등록재산 신고서를 제출토록 한 것은 부정한 재산 증식을 방지하고,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 공직자 윤리를 확립하고자 하는 것으로 재산 기재를 누락한 것은 입법 취지에도 반하고, 국민 알권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공직자윤리법이 정한 신고 대상 재산을 모르고서는 내릴 수 없는 판결이다. 내로남불 논란이 일자 그는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는 공직자윤리법이 정한 재산 신고와 구성요건과 제도 취지가 달라 동일선상에서 보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궤변이다. 공직선거 후보자 역시 일반 공무원과 똑같이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재산 신고를 해야 한다. 이 후보자가 재산 신고를 누락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직무관련성 심사를 피하려는 고의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정권 고위직 인사들의 몰염치는 백지신탁 불복에서도 드러난다.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그의 배우자가 소유한 한 건설업체의 주식을 처분하라는 인사혁신처의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도 똑같은 이유로 배우자 주식의 백지신탁을 거부한 채 소송을 벌이고 있다. 어떻게든 주식을 처분하지 않고 임기를 채우겠다는 ‘시간 벌기’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0년 백지신탁 제도가 합헌이라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공직자가) 직무상 얻은 정보를 활용해 개인적인 주식거래를 한번이라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드러나는 이상, 공직자 전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이미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고, 그 부정이익을 환수하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백지신탁 제도의 존치 필요성을 “국민 신뢰 담보”에서 찾은 것이다. 사후적·형사적 제재로도 부당한 주식거래를 막을 수 있다는 백지신탁 반대론자들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헌재의 합헌 결정과 앞선 백지신탁 불복 소송에서 법원이 잇따라 기각 판결을 내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국민 신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권이다.
백지신탁을 비롯한 이해충돌 제도의 유래는 이 정권이 그토록 ‘사대’하는 미국의 정부윤리법이다. 그 나라에선 이해충돌을 해소하지 않으면 승진은커녕 공직 자체를 맡을 수 없다. 하지만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이균용 후보자에 대한 조사나 징계에 나섰다는 소식을 지금껏 듣지 못했다. 박성근 비서실장과 유병호 총장에 대해서도 “불복은 개인 권리”라며 방치하고 있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은 국외 순방 중에도 야권 추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인 정민영 변호사가 이해충돌 규정을 위반했다며 전광석화처럼 해촉했다.
이 정권에서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 됐다.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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