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타죽은 코알라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어파이어’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인터뷰]
산불이 다가오는 별장 안 네 남녀 이야기
“삶을 즐기지 못한 청년들은 분노 가져”
속물적이고 어리석은 인간이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야기를 즐긴다면 고약한 사람인 걸까. 아무렴 상관없다. 도덕적 우월감 속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좌충우돌은 언제나 재미있으니까. 영화 <어파이어>(13일 개봉)를 기다리는 국내 관객이 많은 걸 보면 이런 고약한 취향이 혼자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어느 여름날 숲길을 달리는 자동차 안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과 ‘펠릭스’(랭스턴 위벨)의 얼굴을 비추며 시작된다. 레온은 작가다. 발트해 연안에 자리한 펠릭스 어머니의 별장에서 두 번째 소설 <클럽 샌드위치>를 완성하려 한다. 그런데 조용히 글을 쓰러 간 별장엔 불청객이 있다. 인근 아이스크림 가게 점원인 ‘나디아’(파울라 베어)다. 레온은 매력적인 나디아에게 첫눈에 끌린다. 하지만 사교적인 펠릭스와 달리 레온은 나디아에게 못된 말만 뱉는다.
레온은 모든 것이 거슬린다. 책은 진전이 없고 출판사 사장은 원고가 별로인 눈치다. 끈질기게 윙윙거리는 벌레들도, 자꾸 수영하러 가자는 펠릭스도, 밤마다 방으로 남자를 불러들이는 나디아도 레온의 신경을 긁는다.
독일의 거장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신작 <어파이어>로 돌아왔다. 역사와 신화를 재료로 만든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국내에도 탄탄한 팬층을 보유한 감독이기도 하다. ‘역사 3부작’으로 묶이는 <바바라>(2012), <피닉스>(2014), <트랜짓>(2018)에 이어 새롭게 시작한 ‘원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 <운디네>(2020)에서 ‘물’을 소재로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를 빚어낸 그가 이번에는 ‘불’에 주목했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페촐트 감독은 언젠가 산불이 난 호주에서 코알라가 불에 타 죽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 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고 회상했다. “모든 것이 불에 탄 자연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요. 그렇게 죽어 있는 모습은 처음 봤죠. (기후위기로 인한) 산불은 인간이 우리 지구에 하는 가장 끔찍한 짓입니다. 청년들이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춤을 추는 아름다운 여름이 더 이상 없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카메라는 주로 별장 안에 머물며 그 안에서 피고 지는 사랑과 질투, 욕망을 담는다. 그러나 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큰 산불이 이어진다. 하늘에는 불을 끄기 위한 헬기가 날아다닌다. 사람들은 산불이 번질까 걱정하지만 레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은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불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을 때는 이미 늦었다.
페촐트 감독은 이번 영화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첫 아시아 방문이기도 하다. K팝을 좋아하는 딸의 권유로 한국에 오게 됐다는 그는 딸에게서 분단과 관련한 한국의 역사를 배웠다. 다만 그는 <어파이어>를 볼 관객에게 배경지식은 필요 없다고 했다. 페촐트 감독은 “저는 한국 역사를 알지 못하지만 <버닝>(감독 이창동)을 보며 분열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며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하지 않을수록 더 멋지게 이해시킬 수 있다. 이것이 영화의 멋진 점”이라고 말했다.
페촐트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GV), 좋아하는 이창동 감독·오정미 각본가와의 만남 등으로 숨 가쁜 일주일을 보냈다. 이번 한국 방문을 계기로 독일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독일은 과거 잘못과 고통을 잊으려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을 즐기거나 자유롭게 일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청년들은 분노를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잇달아 3부작을 기획하게 된 이유에 대해 페촐트 감독은 웃으며 자신의 게으름을 꼽았다. 그는 “저는 좋은 영화를 만들고 나면 ‘이거면 됐다’고 생각해 누워만 있고 싶어진다”며 “그래서 일부러 3부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계속 일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원소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무엇이 될까. 페촐트 감독은 ‘공기’가 다음 소재가 될 것이라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비밀에 부쳤다. “지금 한국의 아름다운 호텔 루프톱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니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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