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王과 國母가 넘쳐나는 나라

이은아 기자(lea@mk.co.kr) 2023. 9. 1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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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교사 면책 등 추진되지만
왕·국모 대접 요구하는
갑질부모 달라지지 않으면
진정한 교권 회복은 요원

'한국에서는 뛰어난 학생들이 교사직을 원한다. 한국에서 교대에 진학하려면 수능 상위 5% 안에 들어야 한다. 중등학교 교사가 되려면 12대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한국 교사는 학급에서 상위 3등 출신이지만 미국 교사의 절반은 하위 3등 출신이다.'

'총·균·쇠'로 유명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2019년 또 다른 저서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에서 미국 공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한국 사례를 언급했다. 한국의 뛰어난 인적 경쟁력은 교사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높은 수준의 한국 교사들은 지금 분노와 무력감에 절규하고 있다. 지난 7월 서울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은 교사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고, 교사들은 거리로 나왔다. 서이초 교사의 49재인 지난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을 선언하며 집회에 참석한 교사들은 10만명이 넘었다. 교사들의 외침에 교권 강화 논의도 본격화했다. 교육부는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를 시행하고, 여야도 정당한 생활지도에 대해서는 아동학대법을 적용하지 않도록 면책 입법을 논의 중이다.

하지만 법이 바뀌고 제도가 개선되더라도, 갑질을 일삼는 학부모들이 달라지지 않으면 진정한 교권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 면책권을 준다고 신고 자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부 공무원인 학부모가 교사에게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돌려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등 지속적인 민원을 제기하고, 담임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해 직위해제 처분을 받게 한 '왕의 DNA' 논란은 학부모 갑질과 교권 추락의 민낯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이 카이스트를 나온 엄마라며 유치원 교사를 몰아붙인 학부모의 녹취도 공분을 일으켰다.

저출산으로 한두 명의 아이만 갖게 된 부모들은 자녀를 왕자·공주처럼 대하고, 최고의 것만 주려 한다. 자녀의 결점을 인정하지 않고, 자녀에게 불리해 보이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빠른 경제 성장과 높은 교육열 덕에 고학력이 된 부모들은 교육 소비자로서 교사를 대한다. 세금으로 교사에게 월급을 준다는 생각은 교사에 대한 무리한 요구로 이어진다. 아이가 학교에서 모기에 물렸다며 관리 소홀 책임을 묻고, 매일 아침 전화를 걸어 아이를 깨워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고 교사를 고소하기도 한다. 최근 5년간 교사가 아동학대로 고소·고발당한 사례가 1254건에 달할 정도다.

'왕의 DNA'는 교권만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갑질 부모들의 태도는 의사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한 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진료보다 '조선의 국모(國母)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자녀를 왕이라고 생각하는 엄마들을 '국모'에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내 자식이 귀하다고, 모두가 내 자식을 왕처럼 대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내 자식을 위한 일이 아니다. 왕이 아닌 건전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칭찬이 필요하지만, 칭찬만으로 훈육할 수는 없다. 기다리는 법과 참는 법, 감사하는 법과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능력을 배울 기회도 필요하다.

교권 추락에 저출산이 겹치면서 이미 2023학년도 대학 정시 모집에서 13개 교대·교육학과 중 11개가 사실상 미달하는 등 교사의 인기는 옛말이 됐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대 부럽지 않던 경쟁률과 커트라인을 자랑하던 교대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한 것이다. 교육이 무너지면 아이들의 미래도 어두워진다.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교사가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다.

[이은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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